송진민(법무법인 맥 변호사)

 

어린 시절 학교폭력 피해를 경험했던 A는, 우연히 자신을 괴롭혔던 동창이 자신과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A는 사과를 요구하기 위해 동창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평소 등산 시 사용하던 등산용 칼을 호주머니에 챙겨갔다. 동창을 만난 A는 상대방의 뻔뻔한 태도에 화가나 동창을 폭행하게 되었고, 주민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에 의해 체포되었는데, A는 동창을 폭행하는 과정에서 등산용 칼을 꺼내지 않았고, 흥분하여 자신이 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상태였다. 이후 A는 위험한 물건인 등산용 칼을 휴대한 상태에서 동창을 폭행했다는 이유로 특수폭행으로 기소됐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구하던 B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동네 선배로부터 아르바이트를 제안받았다. 선배가 제안한 아르바이트는 선배가 알려주는 장소에 가서 의뢰인을 만나 돈을 건네받은 뒤, 건네받은 돈을 선배가 알려주는 계좌로 입금하는 일이었다. B는 다른 동네 친구들로부터 선배가 인터넷 불법 도박 사이트를 운영한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 도박자금을 입금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도박자금이 아니라 전자금융사기(일명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의 돈을 대포통장으로 입금한 것이고, 이후 B는 경찰에 검거되어 보이스피싱 범죄의 공범으로 기소되었다.

언뜻 보면 A와 B는 전혀 다른 상황에 부닥쳐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두 사람은 확정적인 의도가 없었음에도 기소가 되었다는 점에서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다. A는 자신을 괴롭혔던 동창을 폭행하면서 등산용 칼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등산용 칼을 가지고 있었던 탓에 단순 폭행이 아닌 특수폭행으로 기소되었고, B는 보이스피싱 범죄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나 보이스피싱 범죄의 공범으로 기소되었는데, 두 사람 모두 명확한 인식이나 의사가 없었음에도 처벌받을 상황에 놓인 것이다.

A와 B가 처해있는 상황은 형법적으로 볼 때 ‘범의’의 인정 여부에 관한 문제로 볼 수 있다. 형법은 죄의 성립요소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행위의 경우 원칙적으로 벌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형법 제13조). 쉽게 말해 행위자 스스로 범죄행위를 하고 있다고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한 행위는 특별한 처벌 규정이 없는 한 처벌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순히 생각해보면 A와 B도 형법이 말하는 ‘범의’, 즉 범죄의 고의 없이 범죄를 행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A는 동창을 폭행하긴 하였으나 등산용 칼을 주머니에서 꺼낸 사실이 없을 뿐만 아니라 폭행 도중에 칼을 꺼낼 생각도 하지 않았고, B는 다소 불법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예상은 했으나 보이스피싱 범죄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A와 B가 위와 같은 사정을 들어 법정에서 무죄를 주장하는 경우, 그 주장은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범의에 관한 대법원 판례를 살펴보면, 아마 고의가 없었다는 A와 B의 주장은 받아들여지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고의라는 것은 행위자의 내심의 의사이므로 진실을 아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대법원은 고의와 관련성이 있는 간접사실 또는 정황증거를 기초로 고의 여부를 판단하게 된다. 특히 대법원은 행위자가 범죄사실을 명확히 의도하지 않았지만, 범죄사실이 발생할 가능성을 용인한 때도 ‘미필적 고의’를 인정하여 유죄를 인정하기 때문에, 고의를 부정하여 무죄를 선고받는 사례는 흔치 않다.

대법원의 기준에 비추어 A와 B의 사례를 살펴보면, 두 사람 모두 적어도 ‘미필적 고의’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A는 동창을 찾아가기 전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의도적으로 등산용 칼을 챙겼던 것이고, B는 보이스피싱이라는 사실은 몰랐지만, 불법적인 일이라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A와 B의 사정을 고려해보면, 확정적으로 인식을 하고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과 같은 정도의 처벌을 받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확정적 인식 없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정은 대표적인 양형 사유이기 때문이다. 다만 양형 사유가 형의 결과에 언제나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므로, 효과적인 변론이 필요할 것이다. [위 사례들은 이해를 돕기 위해 만들어낸 가상의 사례로, 실제 사건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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