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

그것은 다름 아닌 정대감이 보낸 서신의 내용 때문이었다. 남편을 여의고 수절과부가 되어 사는 딸자식이 시아버지가 급하게 보냈다고 들고 온 서신을 펼쳐 들고 꼼꼼하게 읽어 내려가는 아버지는 그 내용을 읽는 순간 깊이 감응(感應)하는 바가 매우 컸던 것이었다.

‘사돈, 내 비록 아들을 먼저 보낸 고통이 크다고는 하나 나이 어린 며느리가 홀로 되어 독수공방 수절과부로 평생을 늙어 죽을 것을 생각하니 몹시 가슴이 아팠소이다. 인간의 삶에 합당(合當)하지 않는 비인간의 법은 어기라고 있는 것이 아니겠소. 내 여러 날 고민 끝에 작은 꾀를 내어 김제에 산다는 이만갑이라는 용하다는 점술가를 찾아가 며느리와 아주 잘 맞는 사내를 하나 골라서 중매 부탁을 했었소이다. 이제 때가 되어 며느리를 친정으로 돌려보내니 그 뒷일을 잘 부탁드리오이다. 이 모든 것은 내가 모두 꾸며서 한 일이니 사돈께서는 혹여 딸자식을 추호도 나무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부탁이 하나 있는데, 이 모든 것을, 딸자식에게는 절대비밀(絶對秘密)로 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며느리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지난 일을 잊지 못할까 싶어 그러오이다. 윤집궐중(允執厥中) 하라는 것은 비단 황제가 나라를 다스리는 데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가정사에서부터 모든 세상일을 보는데 선비라면 무릇 지켜야 할 당연한 도리(道里)라고 생각되는 바입니다. 사돈께서는 이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그 점 각별유념(各別留念)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돈 정대감의 서신을 읽은 아버지는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던 것이었다. 어린 딸자식을 시집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그 젊은 사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친정아버지로서 딸자식에게 닥친 처참한 운명을 생각하고는 간장을 끊어내는 쓰라린 고통을 감내(堪耐)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아들 잃은 아픔이 자신보다 더 크나클 정대감이 이를 슬기롭게 해결하였다니,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이 가슴 속에서 물밀 져 올라왔던 것이었다.

‘어허! 윤집궐중(允執厥中)이라!’ 여인의 아버지는 순간 이 구절을 마음속으로 깊이 되뇌었던 것이었다. 윤집궐중이라 함은 논어 요왈편에 이른 말로,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줄 때 ‘아! 너 순(舜)아! 하늘의 역수가 진실로 너의 몸에 있으니 진실로 그 중(中)을 잡도록 하라!(堯曰 咨爾舜 天之曆數在爾躬 允執厥中)’고 이른 말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중(中)이란 무엇인가? 어느 한 곳에 치우치지도 아니하고 또 의지하지도 않으면서 과함이나 미치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이, 곧 중이라 하지 않던가!(不偏不倚無過不及之名) 모름지기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서 성현은 매사 끝없이 발동라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이란 사적 감정을 중지시키고 수시처중(隋時處中) 시중지도(時中之道) 해야 함을 말함이었다.

그러한 천하치세(天下治世)에 대한 윤집궐중의 도를 가정사에 있어서도 헤아려 지켜야 함을 정대감이 말하고 있음에 아버지는 몹시 놀랐고, 또 잘못된 법은 어겨서라도 지행합일(知行合一) 하는 올곧은 선비의 의지에 깊이 감동하였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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