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

퇴계가 그날 밤 며느리 류씨 방에서 본 것은, 바로 짚으로 만든 괴(傀), 즉 허수(虛守)아비였던 것이었다. 젊어 남편 잃은 류씨는 홀로 독수공방(獨守空房)하다가 사무치는 남편 그리움에 못 이겨 짚으로 남편의 허상을 만들어 앞에 놓고 앉아 혼자 일인이역(一人二役) 독백(獨白)을 하며 쓸쓸히 자신의 처량한 처지를 달래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독백을 우연히 듣게 된 퇴계는 깜짝 놀라서 며느리의 방을 몰래 엿보게 되었고, 며느리 앞에 하얀 옷을 입고 앉아 있는 어느 선비의 흰옷 자락을 확인하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까무러칠 뻔하였던 것이었다, 놀란 가슴을 가까스로 움켜쥐고 그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퇴계는 소름이 오싹 끼치도록 가슴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서러움을 느꼈던 것이었다.

‘그래, 그러면 그렇지! 엄격한 세상의 부덕(婦德)을 익히고 시집을 온 류씨 며느리가 어쩌자고 이 맑고 고매한 선비 유생의 집안에 백번 죽어도 마땅할 외간 사내를 몰래 버젓이 들여와 한밤에 술잔을 자유로이 주고받을 수 있단 말인가!’

순간 퇴계는 두 눈에 자신도 모르게 타고 내리는 뜨거운 눈물을 주저하지 못하고 멀리 밤하늘로 눈길을 돌렸던 것이었다. 자식 잃은 슬픔에 지아비 잃은 슬픔이 상존(常存)하는 이 인간사의 고달픈 현실을 퇴계가 가슴 깊이 체득(體得)한 순간이었던 것이었다. 그저 공부를 많이 한 학자로서 상상만으로 추측해 알게 된 인생지고(人生之苦)가 아니라 실제로 직접 경험하여 느끼고 체득한 그 아픔이 어떠한 것인가를 퇴계는 깨달아 알았던 것이었다.

‘아뿔싸! 어찌하여 지아비 잃고 가슴 아플 저 젊은 며느리를 한순간이라도 의심하였단 말인가?’

쏟아지는 슬픔을 억누르고 자신을 자책(自責)하며 조용히 방으로 돌아온 퇴계는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 퇴계는 며느리 류씨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인간으로서 인간의 삶에 합당하지 않는 사회적 규범이나 법규에 대하여 퇴계는 대유학자(大儒學者)로서 심오(深奧)한 사색(思索)을 거듭하였던 것이었다.

어느 날 퇴계는 조용히 며느리 류씨를 방안으로 불렀다. 며느리가 방으로 들어오자 퇴계가 말했다.

“아가! 내일은 우리 집에 귀한 손님이 오실 것이니 광에 들어가서 마른 북어며 곡식들을 꺼내 음식을 마련하고 시장에 나가 고기와 과일을 사다가 걸게 상을 잘 차리도록 하여라!”

“예! 아버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며느리는 그 길로 밖으로 나가더니 집안에서 일하는 하녀들을 데리고 온갖 음식을 정성껏 마련하는 것이었다. 다음날 서너 명의 손님이 와서 맛있게 음식을 먹고 헤어졌다. 그런데 그날 오후 손님을 다 보내고 혼자 남은 퇴계는 며느리 류씨를 부르는 것이었다.

“아가! 오늘 음식을 마련하느라 고생하였구나! 오늘 오신 대감댁에 이 물건을 좀 전달해 주고 오너라! 깜박 잊고 이 물건을 전해 주지 못하였구나! 이 물건이 매우 소중한 물건이라 다른 아랫사람을 시킬 수가 없어서 그렇구나!”

퇴계가 비단 보자기에 싼 작은 물건을 턱 내놓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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