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

그렇다면 과연 세종 사후(死後) 그 자리에 무덤을 쓰고 궁궐에는 무슨 일이 있어 났던가? 세종의 큰아들 문종은 종기로 2년 만에 죽었고, 그의 아들 단종은 작은아버지 수양대군에게 밀려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목숨을 잃어야 했다. 그리고 수양대군에게 반대했던 세종의 아들인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이 처참하게 사약을 받고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조카를 내몰아 죽이고 왕이 되었던 수양대군조차 13년 집권 후 지병으로 죽었다. 세조 수양대군의 큰아들 의경세자인 성종의 아버지는 20세에 죽었고, 또 수양대군의 둘째 아들 예종은 즉위 1년만인 20세에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었다.

세종이 죽고 그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라는 권력에 눈이 먼 자가 나와 간신배들과 함께 국정을 농단하며 골육상쟁(骨肉相爭)을 일으켜 피비린내 나는 흉사(凶事)의 연속이었던 것이었다. 세종 사후 19년 후 비로소 천하명당이라는 여주 영릉으로 무덤을 옮기고 성종이 즉위하여 25년간 치세하였던 것이었다.

동기감응! 세종의 무덤 자리가 좋지 않아 그런 흉사가 계속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니면 기이하게도 우연의 일치가 이루어진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세상사에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 더러 있기도 한 것이었다.

여인의 집에서 성대한 환영을 받은 김선비는 정대감이 바라는 바대로 그 여인과 혼인하여 잘 살았다고 하는데, 해마다 점술가 이만갑에게 감사의 선물을 잊지 않았던 것이었다. 김선비의 입장에서는 이만갑의 점술이야말로 자신을 구제해준 최고의 은덕(恩德)이었던 것이었다. 단명해 죽을 목숨을 구해주고 또 평생 배필을 엮어준 데다가 과거급제라는 소원을 이루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정대감의 일은 영원한 비밀이었으므로 김선비와 여인은 정대감의 숨은 음덕은 평생 알 수 없었던 것이었다.

생각해 보건대 제아무리 뛰어난 천리(天理)를 달통(達通)한 도사에 술수가라 할지라도 어찌 항상 유순중정(柔順中正)하여 진실무망(眞實無望)한 경지에 이른 성현과 같을 수가 있으랴! 홀로 된 며느리의 고통을 생각하고 자신의 고통을 뛰어넘는 순수한 인간애(人間愛)를 발현한 정대감의 속 깊은 성현의 마음 씀이 없었다면 이러한 이만갑의 점술은 없었을 것이 아닌가! 천하를 한 손에 거머쥔 권력자는 제아무리 위력이 세다 하여도 그냥 힘만 가진 권력자일 뿐이고, 천하의 부(富)를 거머쥔 부자 또한 제아무리 부자라 할지라도 그냥 돈만 많은 부자일 뿐이듯이, 천하를 희롱하는 술수를 가진 술수가(術數家)의 재주라 할지라도 그것은 그냥 한갓 술수가의 재주일 뿐 아닌가! 천하의 권력이나 돈이나 술수를 가졌다손 치더라도 그 속에 인간의 진실한 마음이 깃들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모조리 해악(害惡)일 뿐인 것이었다. 그러기에 불가(佛家)에서는 백년탐물일조진(百年貪物一朝塵), 삼일수심천재보(三日修心千載寶)라 하지 않았던가!

소강절이 말하기를 노자(老子)는 주역득체(周易得體) 하였고, 맹자(孟子)는 주역득용(周易得用) 하였다고 하였는데 과연 그렇다. 만상(萬狀)의 허(虛)를 찔러 무위의 지극한 정점에 이른 노자, 실상(實狀)의 실(實)을 찔러 역성혁명(逆成革命)에 이른 맹자, 그들의 경지는 모름지기 그러한 것이었으므로, 저 정대감과 이만갑이 빚어낸 여인과 김선비의 각별한 인연(因緣)도 가파르고 거친 시대와 역사를 넘어 유유히 상통(相通)할 수 있었던 것이었으리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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