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규(광주청년정책네트워크 대표)

 

임명규 광주청년정책네트워크 대표

22년 2개월 방영이라는 기록을 세운 TV드라마 ‘전원일기’는 지금도 여러 채널을 통해 재방영 중이다. 종영 후 20년이 지났지만, 인기는 여전하다. 시대를 가로지르며 지어진 1088회의 이야기 속에는 한 사회의 진실이 묻어 있기 마련이다. 특히 주인공 양촌리 김 회장이라는 인물은 대표적 아버지상이란 수식어로 담아내기 어려운 복합적인 진실을 담고 있다.

1980년 ‘전원일기’ 1회의 제목은 ‘박수칠 때 떠나라’이다. 누가, 어디에서 떠난다는 말일까. 양촌리 씨름대회에서 김 회장과 둘째 아들 용식이 맞붙는다. 용식은 일부러 져주지만, 아버지 김 회장은 허리를 다치게 된다. 김 회장은 떠나기를 결심한다. 어디에서? 양촌리의 권력자 자리에서. 양촌리를 권력이 작동하는 하나의 장(Field)으로 보면 그 중심에 김 회장과 그 ‘댁’이 있다.

김 회장(김민재)은 어떻게 그 자리를 가진 걸까? 김 회장은 젊은 시절 농촌운동에 헌신했고 영농 농민회 회장직을 맡았다고 알려져 있다. 여기에 역사적 맥락을 입혀보자. ‘전원일기’의 배경이 경기도 양주시인 점을 고려해 실제 경기도에 있는 송라마을의 60, 70년대 역사를 살피면 김 회장의 삶을 추론할 수 있다. 1960년 송라마을은 청년회를 중심으로 마을협동조합 운동을 시작해 구판장과 정미소, 양수장 등을 설치한다. 이런 활동은 60년대 초반 중앙농협의 영농지도사업과 결합하고 이후 71년 본격화된 새마을운동과 맞물리게 된다(송화진, ‘한국농촌에서 마을의 역량과 마을사업체’). 마을 도로 확장 개설, 소하천 개보수, 퇴비장 설치, 지붕 개량사업 등 농촌 ‘근대화’ 과정에서 양촌리 김 회장은 영농지도자로서 중추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따라서 첫 회의 김 회장은 이미 20년 넘도록 양촌리를 ‘지도’해온 인물로 가정할 수 있다. 양촌리의 근대화 혹은 발전의 역사는 김 회장의 삶 그 자체이다.

이렇게 볼 때, 2002년에 방영한 마지막 회 ‘박수칠 때 떠나려 해도’라는 제목은 꽤 의미심장하다. 내용은 이렇다. 조선시대부터 300년간 이어진 면 단위의 상조 모임인 원동계의 회장직이 공석이 된다. 양촌리와 그 주변 마을을 대표하는 회장을 양촌리에서 뽑아야 한다. 김 회장이 되어야 한다는 측과 세대 교체론이 부상하면서 마을에 미묘한 긴장이 흐른다. 이번에도 둘째 용식이가 등장한다. 용식과 일용은 젊은 세대가 되어야 한다는 편에 선다. 김 회장도 주변의 권유를 거절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몇 가지 생각했던 것을 하고, 손을 떼마”라며 원동계 회장직을 수락한다. 김 회장은 “박수칠 때 떠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어쩌랴, 그것이 또한 인생인 것을”이라며 자신을 연민한다. 이렇게 양촌리의 권력은 약 40년이 넘도록 김 회장을 중심으로 유지되면서 ‘전원일기’는 끝난다.

권력과 세대교체라는 관점에서 보면, 김 회장은 세대교체의 필요성을 인식하지만 22년이 흘러도 권력의 중심부에 남는다. 반면, 용식과 일용의 세대는 ‘다음’이라는 위치에서 벗어나지 않거나, 못한다. 물론 세대교체 그 자체가 무조건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양촌리에서 세대교체가 이뤄지더라도 김 회장의 아들 용식(이장)이나, 김 회장 집과 결합(금동과 복길의 결혼)이 예정된 일용(청년회장)을 중심으로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세대교체가 권력의 작동을 다각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전원일기’ 첫 회에서 김 회장은 “어떤 사람이건 자기가 애써서 성취한 성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내가 아니면 이 성을 지키고 갈 사람이 없다고 독단한다. 이런 사람에겐 박수갈채가 없다. 박수갈채를 받으며 떠날 줄 알아야 한다”라고 다짐한다. 물론 김 회장은 떠나지 못하지만, 독단의 위험과 명예, 존경의 무게를 알고 있었다. 총선을 앞두고 각 정당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어느 쪽이 더 의석을 갖느냐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 경쟁이 얼마나 명예로운지, 그 결과가 존중받을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도 무의미하지 않다. “이것이 인생이다”라는 공허한 대답을 미리 준비한 게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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