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형(동신대 전기공학과 교수·에너지융합기술연구소장)

에너지 전환은 더 이상 미래의 과제가 아니다. 탄소중립, 재생에너지 확대, 전기차 확산, AI·디지털 산업의 급성장 등 급격한 변화 속에서 이 모든 것을 떠받칠 핵심 인프라는 ‘전력망’이다. 그러나 현재의 전력망은 중앙집중형 단방향 구조로 분산형 재생에너지 기반 사회에 적합하지 않다. 전력망이 바뀌어야 산업이 움직이고, 산업이 움직여야 지역이 산다. 성공적인 에너지 전환은 전력망 혁신 없이는 불가능하다.
호남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재생에너지를 생산하는 지역이다. 그러나 이 에너지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전력망 인프라는 취약하고 대응은 미흡했다. 계통 포화, 송전선 용량 부족, 접속 지연은 반복됐고, 출력 제한(Curtailment) 현상까지 발생하며 재생에너지 산업의 동력이 위축되고 있다. 이는 단지 기술과 돈의 문제가 아니라 정책 부재와 산업 전략의 불일치로 인해 발생한 구조적 위기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지역 내 전력 소비 기반의 부족이다. 생산된 전기를 실시간 소비하거나 저장할 전력 수요 기반이 미비하고, 산업 연계 또한 매우 낮다. 재생에너지로 생산한 전기의 절반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RE100 산업단지를 유치하더라도 전력망이 이를 수용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지역은 여전히 ‘전기를 보내는 곳’으로 머물고 있으며 에너지로 산업을 품는 구조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대기업이나 중견기업 등 에너지 다소비 산업을 집중하여 육성해야만 한다.
스마트그리드, ESS, 수요반응 시스템, 전송망 강화 등 기술 혁신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기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속 가능한 에너지 전환을 위해서는 정치적 결단, 제도 개혁, 경제적 인센티브 설계가 병행되어야 한다. 기술은 발전해도 제도와 정책이 따라가지 않으면 지역은 변화의 열매를 얻지 못한다.
또한 전력망을 시설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낡아지고 다시 보완해야 할 대상이다. 전기를 대량 송전하는 방식은 비효율적이며 위험하고 분산화에도 취약하다. 그래서 앞으로는 지역에서 생산하고, 지역에서 소비하는 지산지소형 분산 전원 시스템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 이 시스템은 송전 손실을 줄이고, 에너지 자립도를 높이며, 지역 경제를 순환시키는 구조다.
이러한 구조 전환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에너지 기술만의 문제가 아니다. 재생에너지, ESS, 수소, 전지, 디지털, AI 산업이 융합된 통합 생태계를 함께 조성해야 한다. 에너지는 더 이상 단일 산업이 아니며 첨단 융합 플랫폼이다. 전남은 이러한 산업 융합의 최적지다. 풍부한 자원, 항만, 산업단지, 대학, 기술 인프라가 모두 집약돼 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호남의 전력망 혁신은 호남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의 미래를 밝히는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호남은 국가 에너지 전환의 실증 무대이자 향후 전국 확산 모델을 만들어낼 전략 거점이다. 중앙정부, 산업계, 지자체가 함께 총력 대응에 나서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를 위해 첫째, 지역 분산형 지능계통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마이크로그리드, EMS(에너지관리시스템), MVDC(중압직류송전), 그리드포밍기술 등 지역 에너지 거래 플랫폼을 통해 지역 내 전력 순환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둘째, 현재 배전선로에 최대 20MW밖에 연결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제도를 공급 방법에 따라 이용률을 15%에서 70~90%까지 올려야 한다. 이렇게 되면 당장 2~3년 안에 30GW정도는 늘릴 수 있다.
셋째, AI 기반 수요 예측 시스템과 스마트 수요관리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고 실증센터를 통해 기술을 검증해야 한다. 넷째, 수전해 기반 수소 산업과 전력망을 연계해 계통 잉여 전력을 수소로 전환하는 체계를 마련하고 광주광역시와 광양제철소 등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여야 한다. 다섯째, 이차전지와 연료전지를 포함한 차세대 전지 산업과 전력망을 통합해 새로운 전력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정부는 전남을 ‘차세대 전력망 선도지역’으로 지정하고, 법·제도·재정·인재 등 전방위적 지원을 집중해야 한다. 에너지 전환은 선언이 아니라 실천이다. 호남의 전력망 혁신은 대한민국 100년을 설계하는 첫걸음이다. 지금이 바로 바꿀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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