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군 우수영 공격기회 놓치고 해남읍성으로 이동

(71) 해남지역의 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군 우수영 공격기회 놓치고 해남읍성으로 이동
우수영 이규항 수사 농민군에게 항복할 뜻 비치며 시간 끌기
하루 뒤 화력우세 좌선봉진군 우수영 도착 농민군 憤淚 후퇴
좌선봉장 이규태, 친척 이규항 구하기 위해 서둘러 해남 입성
 

해남현 객사 모습
일제시대 해남현 객사 앞에 학생들이 모여 일본에 충성을 다짐하고 있다. 일제는 신사참배 등 강압적으로 신민화 교육을 진행했다. /해남군 제공
일제 강점기 해남읍 전경.
1991년의 해남읍 전경

■농민군들의 해남 우수영과 해남 읍성 공격(나)

해남 지역 동학농민군이 기포한 것은 1894년 음력 12월 16일이다. 장흥 석대들 전투에 참여한 해남 농민군이 해남으로 도주해와 다시 세를 불린 것을 ‘기포’로 간주한 것인지, 아니면 석대들 전투와는 별개로 해남지역에서 농민군이 자체적으로 일어선 것인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여러 사정상 석대들에서 패하고 온 농민군과 해남에 머물렀던 대다수 농민군들이 위기의식을 가지고 뭉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해남 동부 지역을 이끌던 삼산면의 접주 백장안과 교장 윤종무, 해남 서부 지역을 이끌던 황산면 남리 출신의 대접주 김신영들은 16일 농민군들을 모아 우수영 공격에 나섰다. 수군병력이 있는 우수영을 점령해 이를 근거지로 삼기 위해서였다. 화력이 우세한 일본군과 관군을 맞서 싸우려면 성과 벽이 있는 우수영 진(鎭)은 전투에 꼭 필요한 진지였다.

그러나 농민군은 우수영을 공격하지 않았다. 이는 농민군이 지원군이 도착하기 까지 시간을 끌던 우수영 수사의 기만술책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과거 동학농민군은 농민군을 붙잡아갔던 우수영 수사와 담판을 벌여 농민군들을 석방시킨 적이 있었다. 농민군은 16일 우수영을 공격하기 전에 이규항(李奎桓) 우수영 수사와 담판을 벌였는데 이때 이규항은 잠깐만 생각할 말미를 달라고 농민군들의 공격을 일단 지연시켰다.

이규항은 일본군과 관군이 하루 이틀 사이에 해남으로 들어올 것을 알고 있었다. 조금만 버티면 전투력과 화력이 막강한 일본군이 해남에 들어와 농민군을 섬멸시켜줄 것을 믿고 있었다. 그래서 농민군 지도자들을 설득해 항복하겠으니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농민군들은 전투를 벌여 서로가 다치는 일을 피하자는 이규항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래서 1천 여 명의 농민군은 우수영을 공격하지 않았다.

이규태가 이끄는 좌선봉진군은 1894년 음력 12월 17일에 해남우수영에 도착했다. 농민군과의 전투에 적극적이지 않던 이규태가 서둘러 해남으로 들어온 것은 해남현감이 자신의 조카사위였기 때문이다. 이규항도 이규태의 가까운 인척이었다. 게다가 일본군 미나미 소시로(南小四郞)대대장이 그 이전에 이규태가 굼뜨고 명령을 잘 듣지 않는다고 질책한 것도 좌선봉진군이 해남에 일찍 도착한 이유 중 하나였다.

이규항은 일군과 관군이 목포 쪽에서 해남으로 이동 중인 사실을 알고 시간을 벌기 위해 김춘두를 비롯한 농민군 지도자들에게 농민군을 잠시 물려달라고 요청했다. 이 같은 사실을 몰랐던 동학농민군 지도부는 이규항이 백기 투항할 마음을 갖고 있다 생각하고 병력을 뒤로 물렸다. 농민군들이 잠시 주춤한 사이 월등한 화력을 갖춘 조선의 좌선봉진군이 우수영에 도착해버린 것이다.

농민군들은 이규항의 계략에 땅을 치고 후회했지만 이미 우수영의 성문은 굳게 닫혀 버린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군 지도부는 이곳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이자는 의견과 다시 후일을 기약하자는 의견 등으로 갈렸다. 우수영에 있는 좌선봉진군을 상대로 해서는 농민군의 희생이 너무 클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농민군 해남읍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발길을 해남읍으로 돌렸다.

해남 대접주 김춘두를 비롯한 백장안, 김신영 등 해남지역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은 농민군들을 이끌고 1894년 12월18일(음) 해남읍성을 위해 집결했다. 18일 저녁 해남읍성 밖에 모인 농민군의 수는 1천여 명에 달했다. 농민군 무리에는 장흥 석대들 전투에서 패하고 이동해온 농민군과 무안지역 농민군, 그리고 해남지역 농민군 등 여러 지역의 농민군이 섞여 있었다.

글/최혁 기자 kjchoi@namdonews.com

자료제공/김형진 완도신문편집국장

(박스)

■호국의 현장 전라우수영지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절차 진행 중
 

전라우수영 城址
전라우수영은 우리나라 수군 진성 중 가장 큰 규모였다. 영내에 민가 620호가 있었다. 수군병력도 1천85명에 달했다. 우수영 성 복원을 위한 정부의 지원이 절실하다.

전라우수영은 세종22년인 1440년에 전라도 수군의 본영인 전라수영으로 출발했다. 지방행정개편이 이뤄진 1895년(고종 32년)까지 전라우도 수군의 총지휘부로 남해안 일대의 방어를 전담했다. 우수영은 정유재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의 대승을 거둔 울돌목의 배후기지이자 전략적 요충지다.

전라우수영성지 내에는 조선수군진성 중 가장 큰 규모인 석축 성곽 1천872m와 동서남북 4개의 성문터, 객사·동헌터, 감옥 터 등 각종 군사 시설의 흔적이 남아있다. 전라우수영지(誌)(1787)에는 영내에 민가 620호와 수군병력 1천85명이 주둔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대개 전선 1척당 140여명의 수군이 승선했음을 감안할 때 10여척이 넘는 전선이 상주했음을 헤아릴 수 있다.

해남 우수영의 전라우수영성지는 전라남도 기념물 제139호이다.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기 위한 절차가 진행 중이다. 문화재청 사적분과위는 지난 13일 전라우수영성지를 국가지정문화재(사적)로 지정하기기 위한 1차 심의를 가졌다. 이날 사적분과위는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1만7천740㎡의 전라우수영성지에 대한 1차 심의를 통과시켰다. 글/최혁 기자 kjchoi@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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