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일보 광복 73주년 특집>(2) 카이로선언의 전말

김갑제<광복회 광주전남지부장·국가보훈위원회 위원>

임시정부 김구·김규식 등 장제스에 독립 지지 관철 요청(메인 제목)

中, 공동관리 입장 美·英 설득 ‘한국 독립’ 합의문에 포함(부제)

“일본 패망 후 적당한 시기에 한국이 독립국가 되도록 결정”

美·中 ‘일본 제국주의 팽창 저지’ 공동 목표로 회담 성사

장제스 부인 쑹메이링 특사 역할…英 수상 처칠 포함 시켜

광복회 회원들이 8일 중국 상해 가흥의 대한민국임시정부 피난소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광복회 회원들은 광주지방보훈청 주최로 지난 7일부터 6박 7일 일정으로 상해 임시정부 청사 등 중국내 항일독립운동 사적지 탐방을 하고 있다./광복회 제공
중국 영화계의 황제로 불리우는 한국출신 영화배우 김염의 묘에 선 필자(왼쪽). 김염은 1920년 후반부터 상하이를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대표작으로는 들장미 등 시편이 있다. 상하이 인근 복수원 동원에 유명한 중국배우들과 함께 묻혀있는데 독립운동가 김필순의 아들이다. 김필순의 여동생 김순애는 우사 김규식의 부인이고, 김염의 여동생 김휘는 조선의용대를 창설한 김원봉과 함께 창설한 김창만의 부인이다. 김염은 1930년대 중국의 여자 최고배우였던 완영옥과 결혼하면서 유명해졌으며 1983년 사망했다. 조선청년이 중국 최고배우와 결혼하면서 당시 중국천하가 뒤집혔다고 한다. 사진 오른쪽은 사학자 한시준 단국대 교수.
카이로회의가 열렸던 메나하우스. 현재는 메나호텔로 사용되고 있다./광복회 광주전남지부 제공
카이로회의에 참석한 장제스, 루스벨트, 처칠. 뒤에는 3국의 군사지휘관들. 별을 단 장성만 200명이었다.
일본의 진주만 폭격 장면
일본의 진주만 폭격 장면
루스벨트의 제의가 거듭되자 장제스는 부인 쑹메이링(宋美齡)과 논의해 줄 것을 부탁했다. 쑹메이링은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에 영어에 능통했고, 무엇보다 미국문화를 잘 알았다. 또한 외교력도 있었다. 결국 그녀가 미국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먼저 미국을 방문하게 된다. 루스벨트는 쑹메이링을 백악관 자기 부인 방에서 부인과 함께 숙식하게 하는 등 체류 일주일 동안 국빈과 같은 최상의 예우를 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미국의회에서 연설하게 하였는데 쑹메이링은 동양 여자로소는 최초로 미국의회에서 연설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다시 중국에 돌아온 쑹메이링은 1943년 6월 중국 외교부장 쑹쯔원(宋子文)과 함께 다시 방미, 루스벨트를 만나고 돌아왔다. 국빈과 같은 예우 탓이었을까? 쑹메이링이 돌아온 후 회담문제가 급진전된다. 장제스는 부인으로부터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7월 8일 루스벨트에게 만나자는 답변을 보냈다. 이후 중국과 미국 사이에 회담장소와 대상자 및 시기를 두고 교섭이 오갔다. 회담장소로 알래스카가 논의되기도 했고, 소련의 스탈린과 영국의 처칠을 참석토록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졌다. 결론이 난 것은 11월1일이었다. 장소는 이집트 카이로, 참석자는 루스벨트·처칠·장제스 등 세 사람으로 결정됐다.

루스벨트가 장제스를 만나고자 한 데는 의도가 있었다. 일본군을 중국대륙에 묶어두려는 것이 그 의도였다. 장제스에게 항복하거나 타협하지 말고 일본과 열심히 끝까지 싸워 줄 것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사실 1941년 12월 진주만을 기습공격당한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군함 대부분이 바다에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1942년 4월경 태평양의 모든 섬들을 일본이 장악했고,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침략할 우려가 있었다.

루스벨트는 만약 뉴질랜드와 호주까지 일본에 넘어가면 전쟁은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때문에 일본이 태평양으로 군대를 동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최선의 방안은 장제스가 열심히 싸워줌으로써 일본군을 중국대륙에 묶어두는 것이었다.3국 군사회담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임시정부는 시급히 장제스를 만나고자 했다. 중국국민당 조직부장으로 한국담당자였던 우티에청(吳鐵城)에게 면담을 요청했고, 면담은 성사되었다. 1943년 7월 26일 오전 9시 주석 김구, 외무부장 조소앙, 선전부장 김규식,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 부사령 김원봉 등 임시정부 요인 5명은 통역으로 안원생을 대동하고 장제스를 만났다. 이같은 사실은 중국 측의 ‘총재접견한국영수담회기요’라는 제목으로 명백히 기록으로 남아있다.



다음은 면담기록 중 일부.

김구· 조소앙 : 영국과 미국은 조선의 장래 지위에 대해 국제공동관리 방식을 채용하자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중국은 이에 현혹되지 말고 한국의 독립 주장을 지지하고 관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장제스 총재 : 영국과 미국 쪽에서는 확실히 그러한 논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국제공동관리 문제에 대해) 반드시 쟁집(爭執 논쟁)이 많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한국 내부의 정성통일과 공작표현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중국도 역쟁(力爭)할 수 있고, 일에 착수하기도 쉬울 것입니다.



미국과 영국이 국제공동관리를 주장하고 있는데, 중국은 이에 현혹되지 말고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고 관철시켜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장제스는 미국과 영국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며 쉽지 않은 일이라 했고, 앞으로 쟁집이 많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장제스는 약속했다. 중국은 한국의 독립을 위해 ‘힘써 싸우겠다’고. 장제스는 약속을 지켰다. 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한국의 독립’을 제안하기로 한 것이다.

중국은 회담에서 제안할 문제들에 대해 사전에 준비를 했다. 사전준비는 군사위원회 참사실과 국방최고위원회 비서청 두 곳에서 별도로 이루어졌다. 말하자면 3국 군사회의 TF 팀 인셈. 여기에는 일본이 패망하면, 청일전쟁 때 빼앗긴 대만과 팽호도, 1931년 일본이 차지한 만주는 중국에 귀속토록 한다는 것 등이 준비되었다. 다행히 두 곳 모두에 ‘한국의 독립’을 제안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장제스는 일기에도 제안할 사항으로 ‘한국의 자유 독립’을 적어 놓았다. ‘장개석 일기’는 현재 미국의 스탠포드 대학에서 소장하고 있고, 몇 년 전부터 공개하기 시작했다. 장제스는 그날의 주요 사항, 그날 해야 할 일, 그날 한 일 등을 일기로 꼼꼼히 기록해 놓았다.

카이로에 도착한 이후에도 회의에서 제안할 내용을 적어 놓았는데, ‘전후 한국의 완전 독립과 자유’ ‘전후 한국의 독립’이라며, 한국 독립을 제안한다는 것을 거듭 확인하고 있었다. 카이로회의는 3국의 정상들이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장제스였다. 장제스는 11월 21일 오전에, 처칠은 오후에, 루스벨트는 22일 오전에 도착했다. 회의 장소는 카이로 교외에 있는 메나하우스(Mena House)였다. 메나하우스는 1850년대 영국의 귀족이 지은 별장으로 사람 얼굴에 짐승 모양인 스핑크스와 가장 큰 피라미드가 있는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장제스와 처칠의 숙소는 메나하우스에 마련되었고, 루스벨트는 이집트 주재 미국대사 관저에 머물렀다. 카이로회의는 23일에 개최되었다. 오전 11시 3국 정상들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가 열렸다.

카이로회의는 전후 문제를 다루는 정치회담이 아니었다. 군사회담이었다. 미·영·중 3국이 일본과의 전쟁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 특히 중국의 대일작전에 대한 문제가 주요 의제로 다루어졌다. 카이로회의에는 3국의 군사지휘관들이 참석했고, 회의장에 뜬 별이 무려 200개가 넘었다고 한다. 오후부터 군사 실무담당자들이 모여 회담을 가졌다.

한국문제가 논의된 것은 11월 23일 저녁이었다. 저녁 7시 반 장제스는 부인 쑹메이링과 함께 루스벨트 숙소에서 만찬을 함께 했다. 장개석· 쑹메이링· 루스벨트와 그의 보좌관 홉킨스(Harry Hopkins) 등 4명이 참석했고, 시간은 밤 11시까지 이어졌다. 이때 장제스는 일본이 패망하면 대만·팽호도와 만주는 중국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것 등 중국이 준비해간 것을 제안했다. 전후 한국을 자유 독립국으로 하자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중국 측은 카이로회의 전 과정을 기록하였고, 이를 <카이로회의 일지(開羅會議日誌)>로 남겨 놓았다. 루스벨트는 장제스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대부분 동의하였고, 회의는 원만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장제스와 루스벨트가 합의한 내용을 근거로 초안이 작성되었다. 만찬을 마치고 헤어질 때, 루스벨트는 보좌관 홉킨스에게 장개석과 협의한 내용을 근거로 초안을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24일 오전 홉킨스는 백악관 문서기록관인 코넬리우스(Albert M. Cornelius)를 불러 타이핑을 시켜 초안을 작성했다. 초안은 루스벨트의 결재를 거쳤다. 홉킨스는 오후 4시에 초안을 가지고 와 쑹메이링에게 전달했다.

중국측 실무자인 왕총후이(王寵惠)는 이를 중국어로 번역하여 장제스에게 보여주었다. 장제스는 팽호도의 이름이 잘못된 것을 지적한 것 외에 만족을 표시했다. 초안에는 한국문제가 다음과 같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일본이 한국인에 대해 노예대우를 하고 있음을 잊지 않고 있으며, 일본이 패망한 후 적당한 시기(at the proper moment)에 한국으로 하여금 자유 독립의 국가가 되도록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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