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신라 왕족 고려 국자좨주 박진승 시조
문장가 박승중, 개국공신 박의룡 후손
박익경 단종복위사건 때 무안 입향
충절 마을 고절리, 국난마다 의병 창의
종가조부터 대대로 효자 배출한 집안

종가 안채와 정원
종가 안채와 정원

충절과 효행 전통 잇는 절의(節義) 높은 가문
서해바다와 인접한 전남 무안에는 ‘절의’로 이름 높은 마을 고절리가 있다. 단종 복위사건의 사육신과 연결된 종가조 은둔 사연, 왜적 침략에 순절로 항전한 송씨부인 등 수많은 사연으로 충절을 이어오고 있는 무안박씨 무안파 애한정 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본다.

◇박진승 풍속 교화 공적…무안을 식읍으로
무안박씨(務安朴氏)는 신라 경명왕 여섯째 아들 완산대군 박언화의 5세손인 박진승을 시조로 모신다. 그는 고려조에 문과 급제하고 국자좨주(국자학의 교장)로서 나라 풍속을 고조선의 8조급법에 맞춰 교화한 공으로 무안을 식읍으로 하사받았다. 그의 아들 박섬(?~?)은 거란의 침입 때 나주로 몽진하는 현종을 호종했고 개경을 수복하는 동안 변함없는 절개로 사직을 안정시킨 공을 인정받아 남행호종공신에 녹훈됐고 벼슬은 상서우복야에 올랐다.

박섬의 증손자인 박승중(?~?)은 문과 급제해 중서주서로‘해동비록’ 편찬을 담당하고, 한림사독학사로 상정관이 돼 ‘예의’를 정했다. 기거사인으로 요나라에 다녀오고 한림학사승지, 보문각학사, 정당문학 참지정사, 중서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했다. 그가 홍범과 시경을 강론하고 시정책요 편찬, 예종실록 편수에 참여해 고려사절요 등에 기록됐다. 7세손 박문오(1258~?)는 고려조에 문과 급제해 정승에 이르렀고, 홍건적을 토벌한 공으로 면성(무안)부원군에 군봉됐다. 무안에 낙향해 유산정과 생선지(연못)를 짓고 소요하며 만년을 보냈으며 무안 병산서원에 배향됐다.

◇애한정 짓고 은둔한 학자 박익경
10세 박의룡(1330~1430)은 조선 개국공신으로 벼슬은 호조, 병조, 형조 판서를 거쳐 영중추부사에 올랐고 병산서원에 배향됐다. 14세 박임경(?~?)은 황주목사를 지낸 문신으로 성삼문의 사위로서 단종복위사건(병자사화)으로 죽임당한 사육신(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의 시신을 수습해 한강변 노량진 인근에 매장(사육신묘)했다고 전해진다. 박임경의 동생 박익경(1438~1520, 호는 애한정)은 단종 때 효행으로 정릉참봉에 천거됐으나 단종복위사건으로 벼슬을 내려놓고 무안으로 내려와 애한정을 짓고 은거했다. 그가 입향한 마을이 ‘고절리’다. 그는 병산서원에 배향됐고 애한정 종가를 열었다.

16세 박언홍(1485~1558)은 선무랑 의서습독관을 역임했다. 그의 아들 17세 박종룡(1520~1597, 다른 이름 응룡)은 생원시에 합격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 박문룡과 아들 박신에게 책임을 맡겨 김천일 장군 의병군에 양식과 기계를 지원했다. 17세 박제(1547~1620)는 효성과 우의가 뛰어난 의병장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백명의 의병군을 모집하고 군량 조달 책임을 수행했다. 정유재란 때는 의병군을 이끌어 무안 보평산에 산성을 쌓고 왜적을 무찔렀다. 그의 부인 여산송씨는 진지에서 밥을 짓다가 전투가 치열해져 왜적에게 팔을 붙잡혔고 더러운 무리가 어찌 감히 욕되게 하느냐고 소리치며 잡혔던 팔을 돌로 내리치고 은장도를 뽑아 자결했다. 이에 의병군이 전열을 정비, 결사항전함으로써 왜적을 막아내 승리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송씨부인의 순절을 기리는 정려가 내려졌고, 공을 세운 박제는 진위장군에 제수됐다.

◇의로운 가문 전통, 효행으로 계승 힘써
18세 박신(1546~1597)은 부친의 명으로 김천일 의병진에서 활약하고 이순신장군의 부장이 됐고 선무원종공신록에 올랐다. 박동주(?~1672)와 박심(?~1674)은 병자호란 때 의병 창의했고, 박래초(1696~1742), 박상초(1700~1748), 박문초(1692~1745)가 이인좌의 난에 의병을 일으켰다. 박현남(1856~1937)은 한말 최익현 의병에 참여했다. 효자로 알려진 인물은 박익경, 박혜, 박래초, 박중갑, 박치운, 박혁조, 박혁진, 박혁삼, 박혁기, 박민채, 박승재, 박동재, 박석규 등이다. 29세 박승재(1863~1943, 호는 만헌)는 노사 기정진의 문인으로 현재의 종가터 옆에 연방정을 세우고 학당을 열어 후진 양성에 힘썼다. 한때는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연방정에서 인근에 사는 1~2학년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었다. 종가는 종택을 비롯한 유산을 보존하며 훌륭한 선조의 정신 계승에 힘쓰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무안박씨삼강비. 충신 박신, 효자 박종찬, 열부 나주정씨를 기리는 충효열삼강비
무안박씨삼강비. 충신 박신, 효자 박종찬, 열부 나주정씨를 기리는 충효열삼강비
현산비
현산비
박제장군 처 여산송씨 정려의 현판. '증자헌대부 호조판서 무안박제처 정부인 여산송씨지려'
박제장군 처 여산송씨 정려의 현판. '증자헌대부 호조판서 무안박제처 정부인 여산송씨지려'
연방정. 정각이라 불렀고 노사문인 박승재가 학당을 열어 후진양성했던 건물로서 일제 때 학교가 멀어 통학이 어려운 어린 학생들(초등 1~2학년)이 배우는 학교 공간(학교교사를 파견해 교육함)으로도 사용된 배움터 건물이다. 상당기간 재실로 사용하고 있는 현재 이름은 영모재라고 한다.
연방정. 정각이라 불렀고 노사문인 박승재가 학당을 열어 후진양성했던 건물로서 일제 때 학교가 멀어 통학이 어려운 어린 학생들(초등 1~2학년)이 배우는 학교 공간(학교교사를 파견해 교육함)으로도 사용된 배움터 건물이다. 상당기간 재실로 사용하고 있는 현재 이름은 영모재라고 한다.
애한정
애한정
애한정 현판
애한정 현판
종가 정원
종가 정원
종가 안채
종가 안채
박제 장군 부인 여산송씨 정려
박제 장군 부인 여산송씨 정려
여산송씨 기적비
여산송씨 기적비

 

당신을 위한 추천 기사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