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공민왕 호종공신 고중연 장흥高 열어
4대 연속 문과급제로 알려진 문장가들
금산·진주 전투로 호남 보루 지킨 충신
유적 보존하고 세독충정 뜻 계승 힘써

대대로 독실한 충의·절효 …천하제일 충신 가문

종택 안채. 고경명 생가
종택 안채. 고경명 생가

광주 남구 제봉산 자락에는 고인돌이 군락을 이루는 전통마을 압촌이 있다. 문과 장원 급제한 문장가가 60세에 전라의병군 대장으로 추대돼 6천 병력을 이끌고 40일간의 사투 끝에 금산에서 둘째 아들과 함께 순절했다. 살아남은 큰아들은 부친과 동생의 시신은 물론 순절한 호남 의병들의 시신을 수레에 싣고 귀향해 집집마다 장례를 돕고 복수의병군을 규합해 2차 진주성 전투에 출전해 김천일, 최경회 장군과 함께 순절한다. 나라에서는 이 집안 7인의 충효열을 기려 포충사와 고씨삼강문이 내려져 압촌 일대에 보존되고 있다. 만고에 길이 남을 충효의 명가 장흥고씨 충렬공파 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본다.

◇정국공신 고자검 광주 입향
장흥고씨는 탐라국을 세운 ‘고을나’를 시조로 모시고, 제주도의 초대 성주로서 고려 태조로부터 성주왕자 칭호를 받았던 고말로를 중시조로 모신다. 고말로 10세인 고중연(다른 이름 고복림)은 공민왕의 안동 피난을 호종해 장흥백에 봉해졌고 이로 인해 전남 장흥을 본관으로 하는 장흥고씨가 세계를 잇고 있다. 3세 고백안(?~?)은 지영주사를 지내고 아들 고협(?~?)을 익원대군의 딸과 혼인시켜 고려 왕족과 혼맥을 맺고 조선이 개국하자 전라도 영광(현재의 장성 삼계)으로 이거했다. 고협은 이방원의 친구로서 태종이 신부(臣傅)라는 이름을 주며 신하 겸 스승으로서 도와달라고 요청했으나 불사이군 의리 지켜 거절했다. 그의 증손자 7세 고자검(?~?)은 성균훈도로 중종반정에 참여해 정국원종공신에 오르고 광주 압보촌(남구 압촌동)에 입향했다.

8세 고운(1495~?, 호는 하천)은 문과 급제해 형조좌랑을 지내고 기묘사화에 연좌돼 대동야승, 기묘록보유에 이름을 올린 현인이다. 백이론(군신간 예의), 이격문정론(형제간 우애)를 논하고, 조광조, 박상 등과 교유한 시가와 산문들을 하천유집에 남겼으며 백액대호(간송미술관 소장)를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그의 아들인 고맹영(1502~?), 손자 고경명(1533~1592)에 이어 증손자 세형제 고종후(1554~1593), 고인후(1561~1592), 고용후(1577~?)가 문과 급제하는 학문의 명가로 이름을 높였다. 고맹영은 사헌부지평을 거쳐 옥천군수로 선정을 베푼 데 따른 포상을 받았고 동부승지, 병조 이조, 호조의 참의를 역임했다. 그가 세자시강원 보덕으로 있을 때 고경명이 장원급제해 세자시강원 사서에 임명돼 부자가 함께 제왕 교육에 참여했다. 이는 충렬공파 후손들에게 가학으로 이어졌다.

◇ 부자가 세자 교육한 빛나는 가학
10세 고경명(호는 제봉, 시호는 충렬)은 문과에 장원급제해 사헌부지평, 홍문관부교리를 거쳐 부친의 실각과 함께 광주에 낙향, 19년간 세독충정(世篤忠貞, 대대로 독실히 충성을 다함) 좌우명을 걸고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 매진했다. 그는 식영정가단의 ‘식영4선(임억령, 김성원, 정철과 함께)’으로 알려진 명문장가로서 무등산 기행문 ‘유서석록’을 비롯한 명문을 제봉집에 남겼다. 60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창의해 담양 추성관 회맹에서 유팽로 등의 추대로 전라의병대장이 됐고 양산숙을 행재소에 보내 선조의 재가를 받아 공조참의 겸 초토사에 임명됐다.

6000명의 의병군을 이끌고 근왕을 위해 상경하다 곡창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금산에서 격퇴시키기 위해 출전해 예봉을 꺾었으나 장기전으로 지키는 대신 죽음을 불사하는 격전을 선택해 아들 고인후 등 의병장들과 연합했던 700의총의 조헌부대와 함께 순절해 40일간의 의병대장 소임을 마쳤다. 광주 포충사, 금산 성곡서원, 종용사, 순창 화산서원 등에 배향됐다.

◇ 세독충정 따라 순절한 진주3장사
11세 고종후(호는 준봉, 시호는 효렬)는 문과 급제해 교서관정자, 성균관전적, 감찰, 예조좌랑 등을 거쳐 임피현령을 역임하던 중 유아로 고을을 다스렸다는 탄핵으로 광주에 낙향했다. 그는 고경명의 의병창의에 참여해 격문을 작성하고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승병까지도 의병 참군을 독려했다. 군량을 수집하며 제주에서 전마를 조달하는 등 맹활약 했다. 격전 중 살아남아 부친과 동생의 시신을 수습하고 함께 순절한 전라의병의 시신을 달구지에 싣고 광주로 귀환했다. 고종후가 정성스런 제를 올려준 전라의병들의 친족들은 신분을 초월한 형제, 동지로 대우하는 그를 따라 복수의병군 깃발아래 결집했고 도체찰사 정철은 사노를 뽑아 합류시키도록 했다. 광주 절양루에서 훈련한 의병군은 진주성으로 출병해 호남으로 향하는 10만여 왜적을 막기 위해 김천일, 최경회, 황진 등의 의병장과 함께 고립됐지만 최후까지 싸우다 촉석루에서 남강에 투신해 순절했다. 집안 노비 봉이와 귀인도 의로운 죽음을 따라 물에 뛰어들었다. 그를 ‘3장사’로 칭하며 이조판서에 증직하고 효열이란 시호를 내려 포충사와 진주 창열사에 배향됐다.

충신 고경명을 비롯한 고씨 일가 효자, 열부 7인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고씨삼강문을 내렸다. 후손들은 압촌에 세거하며 종가를 지키고 불천위를 모시고 있다. 종택(고원희가옥,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8호), 포충사(광주광역시 기념물 제7호), 고씨삼강문(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2호) 등 유적을 보존하며, 대대로 가학을 잇고 세독충정의 정신 계승에 힘쓰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포충사
포충사
옛 포충사의 동재와 서재
옛 포충사의 동재와 서재
옛포충사 사우
옛포충사 사우
고씨삼강문
고씨삼강문
충노비. 임진왜란에 순절한 '봉이, 귀임'의 충절을 기리는 비로서 매년 포충사 향사 때면 이들을 기리는 제를 올리고 있다. 이들 역시 고씨삼강문에 올려 순절을 추모해야 한다며 고씨집안 충효절 삼강문 인물이 9인이 되어야 한다고 고호석 (재)충렬공제봉고경명선생기념사업회 사무처장은 가문의 의견을 말했다.
충노비. 임진왜란에 순절한 '봉이, 귀임'의 충절을 기리는 비로서 매년 포충사 향사 때면 이들을 기리는 제를 올리고 있다. 이들 역시 고씨삼강문에 올려 순절을 추모해야 한다며 고씨집안 충효절 삼강문 인물이 9인이 되어야 한다고 고호석 (재)충렬공제봉고경명선생기념사업회 사무처장은 가문의 의견을 말했다.
고경명 영정
고경명 영정
고종의 왕자 이준이 내린 글씨 현판. 일문충효만고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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