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때부터 있었다는 서울역 맞은 편의 양동, 도동, 순화동 판자촌은 전쟁이 끝나고 사람들이 서울로 몰려들면서 판자집이 더욱 늘어났고, 그 자리에 사창가가 번창했다. 경제개발과 고도성장기가 이루어지고, 노동인구가 도시로 대거 이입되자 서울에 2차 판자촌이 형성된 것이다. 그것이 이십여 년 지나자 판자촌은 독버섯처럼 도시 전체로 번져나갔다.

페인트 냄새, 콜타르 냄새, 썩은 판자 냄새로 집은 악취가 났지만, 얼결에 집을 지은 김구택이 오성공을 불렀다.

“어째 정이 안간다. 아무래도 이 집을 너에게 주고 나는 내려가얄랑개비다.”

“그럼 나는 인자씨한티 사정없이 지청구를 들을 것이다. 친구 하나 제대로 개비하들 못하고, 또 목포 뒷골목으로 보내버리냐고 말이다. 나 생각해서도 여기 있어. 그리고 진로를 생각해보장깨.”

“나에게 무슨 꿈이 있고, 진로가 있겄냐. 그냥 구름 가는대로, 강물 흘러간대로 살란다.”

“무슨 땡중 염불하는 소리여. 너는 머리가 좋고, 영어 실력이 있잖냐. 목포 외국인 선교사들하고 꿇리지 않고 영어를 사용한다는 말 들었다마다. 그랑깨 여기다 영어학원을 차리는 것이여. 그래서 마루를 크게 잡았지 않냐. 여기다 동그란 밥상 서너개 놓고 아그들 갈치면 되는 것이제.”

“너는 왜 생각이 한가하냐.”

“한가한 것이 아니라 실용적이제. 앞으로는 영어라야만이 얼굴 내밀고 산다고 하들 않디야? 10년, 20년, 30년 후에는 글로벌 시대가 오고, 그런 시대에 영어로 프리토킹 가능한 사람이 세상을 주무를 수 있당깨. 그런 수준되는 사람 되어불면 먹고 사는 디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마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르쳐봐. 빈민촌 아이들을 가르치면 내중에 사람 대접 받는다마다. 옛날 죽도 못먹고 공장 다니다 뚝방촌에서 선생 하나 잘 만나 출세하면, 평생 그 은혜 잊지 않는 것이제. 얼마나 보람찬 일이냐. 그 제자 만나서 팔짜 고칠 수도 있고 말이다.”

“천박한 새끼, 고따우 대접받을라고 아이들 가르치냐.”

“미친 놈아, 인간은 대접받을라고 제자를 양성하고, 사람되는 거여. 목적없이 뭐하자는 것이여? 대접받자는 것은 아니지만, 훌륭한 사람을 기르다 보면 대접받는다는 뜻이제.”

“나는 그런 생각하는 자체가 남사스럽다.”

“아마 며칠 후 인자씨가 아이들 몰고 올 것이다. 동네 아줌씨들한티 용한 영어선생이 들어왔다고 선전했다더만. 무료 강좌인디, 다만 조금씩 성의만 보이면 된다고 했다더랑깨. 시중 학원비보다 3분지 1로 해준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음날 김인자가 날라온 소식은 전혀 뚱딴지 같은 것이었다.

“판자집들을 철거한다고 해요. 보름 후 철거반이 출동한다는 거예요.”

“뭣이?”

김구택이 바짝 긴장하고 물었다. 집을 짖자마자 철거한다고? 욕심나는 판자집은 아니지만 막상 철거한다니까 자존심상 수용할 수 없었다. 분쟁과 대결이 있는 곳에 김구택은 생명력을 발휘한다. 시청 사람들을 상대로 한번 겨뤄보고 싶었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김인자에게 물었다.

“철거반대 대책반을 구성합시다. 마을 사람들 모아줄 수 있소?”

그러나 김인자의 대답은 엉뚱했다. 그녀가 희망에 부푼 얼굴로 말했다.

“서울 도심부 판자촌을 서울 외곽으로 강제 이전시킨다고 하지만 거저 쫓는 것이 아니에요. 외곽의 토지를 불하해주는 조건으로 이주시킨다는 거니까 손해볼 것 없죠. 한 가구당 7평 남짓 땅을 불하해주니 우리 두 집 것만 해도 열네 평되는 거예요. 거기에 집을 지을 수 있죠. 빈 땅에 판자집 짓고, 시에서는 나가달라고 싹싹 빌며 땅까지 주니 이런 나라가 어디 있어요?”

“하지만 일곱 평이나 열네 평의 땅에 어떻게 집을 짓소?”

“그러니까 시에서도 방법을 냈죠. 4가구가 합해서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한다는 거예요.”

실제로 서울시는 판자촌 거주민 4가구에 30평 남짓의 땅을 할당해주었다. 이런 땅을 백묵으로 선만 긋고 각 가구에게 텐트 하나씩 주고 집 짓고 살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생긴 마을이 당현천마을, 양지마을, 합동마을, 희망촌, 그리고 중계본동 백사마을 등이었다.

하지만 사는 여건이 불비해 사람들은 견디지 못하고 헐값에 땅을 팔고 떠나갔다. 일부에서는 분쟁이 일어나 집을 짓지 못하고 개인들끼리 대판 싸웠다. 이런 정책의 부작용이 적나라하게 나타난 곳이 경기도 광주대단지(오늘의 성남시 수정구, 중원구)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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