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일 남도일보 편집국장

고무신이 처음 이 땅에 상륙한 것은 일제 강점기인 1910년대 후반이다. 죽을 때까지 짚신이나 비단신, 가죽신, 나막신 밖에 모르던 민중에게 고무신은 이색적이고 다소 진귀한 물건이었다.

고무신을 가장 먼저 신어 본 사람은 일제에 의해 창덕궁에 유폐돼 있던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이자 조선의 제27대 왕인 순종(純宗)이었다. 그가 어떤 경로로 고무신을 구입해 그것도 흰 고무신을 즐겨 신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기대와 달리 고무신은 애초 구두 형태여서 서민들에게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를 개발한 일본에서조차 공기가 잘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외면받았다.

이러던 고무신이 모두의 사랑을 받게 된 비결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1919년 평양에 맨 처음 고무공장을 만든 고무배합기술자 이병두의 혁신적인 안목이 숨어 있었다. 그는 1920년 남자 고무신은 짚신, 여자 고무신은 코신을 본떠 전래의 신발모양으로 제조해 시판했다. 신발 입구가 넓은 전통 신의 특징을 살린 고무신의 토착화 시도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고무신의 인기가 치솟자 1922년 경표·상표·대륙표 등 1년 새 고무신 공장이 20여개나 생겨났다.

업체 간 생존을 위한 광고전도 치열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내구성을 강조했다. 막강한 경쟁 관계인 짚신을 공략하기 위해서였다.

별표 고무신은 “강철 보다 강해 찢어지지 않는다”고 선전했고 만월표 고무신은 “고종의 둘째 왕자인 이강(李堈) 전하가 손수 고르셔서 신는다”고 강조했다. 거북선표 고무신은 “1년간 사용 보증”이라면서 “유사 상표에 주의할 것”을 당부했다.

고무신은 종이와 마로 만든 미투리가 25전인 데 대해 40전 밖에 안 돼 가격 경쟁력도 있었다. 싸고 질긴데다가 방수가 잘 돼 비가 오더라도 나막신으로 갈아 신을 필요가 없었다. 특수층이나 신던 갖신이나 비단신과 겉모양이 비슷할 뿐만 아니라 착용감도 괜찮았다.

고무신의 색상은 하얀색과 검은색이 일반적이었다. 검은색은 중년 이하에서 평상시에 신었고 고급품 취급을 받은 하얀색은 나이 든 노인이나 결혼식, 돌잔치 등 특별한 날에 신었다. 1930년대 중반에는 도시인 대부분이 고무신을 신는 게 생활화된 반면에 농촌에서는 어려운 형편 때문에 짚신과 나막신이 대세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고무 산업은 침체기를 맞이한다. 전략 물자에 속한 고무의 수입이 중단된 까닭이다. 고무신 값은 몇 배씩 올랐고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품귀현상까지 생겼다. 1938년 총독부는 고무신 제조 자체를 금지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1939년 6월 6일자 조선일보는 “일반 가정 부녀자에게 가장 총애를 받아오던 흰 고무신을 돈 주고도 살 수가 없게 돼 많은 부녀자들이 문 밖 출입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형편”이라고 적었다. 전쟁이 확산되자 일제는 1941년 7월부터 고무신 배급제를 도입했다. 수요가 공급을 따르지 못하자 고무신을 비싼 값에 몰래 파는 상인이 생겨났고 이를 경제경찰이 단속했다.

이처럼 1945 해방 이후 6·25전쟁 때까지 이어졌던 인기는 1960년부터 고무신의 단점을 보완하고 발의 위생적인 면을 고려해 만든 운동화의 대중화와 구두의 생활화로 점점 밀려나기 시작했다. 대신에 적지 않은 추억을 남겼다.

고무신은 우선 과거 물자가 부족하던 시절에는 누가 훔쳐가는 일이 잦았다. 이를 막기 위해 불에 달군 부젓가락으로 고무신 앞이나 바닥에 이름을 새겼다. 찢어지거나 구멍이 나면 기워 신었다. 재래시장에 가면 불에 달군 쇠틀과 본드를 이용해 찢어진 고무신을 때워주고 몇 푼 씩 챙기는 수선공이 있었다.

극소수 학동 중에는 더 이상 신지 못하는 고무신 조각을 휘발유에 불려 지우개로 사용하기도 했다. 딱딱하다보니 노트가 찢어지기 일쑤여서 호기심 수준의 시도가 대부분이었다.

여름이면 강가에서 놀다가 벗겨져 떠내려가는 고무신을 주우려다가 깊은 물에 빠지거나 물살에 휩쓸려 변고를 당하는 일도 있었고 손재주가 좋은 애들은 복원력이 뛰어난 고무신을 이용해 장난감 기차나 배, 자동차 등을 만들어 가지고 놀았다.

근래 남자 친구가 군대 간 새에 이별을 고한 여성의 행태를 가리켜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다’고 표현했는데 요즘도 간혹 통용되고 있다.

막걸리와 함께 부정선거의 상징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고무신은 60,70년대 정치인들이 유권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뿌렸던 대표적인 금품이었기 때문이다.

한 세기 민중의 생필품이던 고무신은 이제 거의 볼 수가 없다. 간혹 시골 노인이나 사찰의 승려들이 찾으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한때 교도소 재소자들이 신기도 했지만 끈 없는 운동화가 그 기능을 대신한다. 매사가 그렇듯이 설자리를 잃은 고무신에 대한 기억도 우리 곁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다.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