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치남(남도일보 주필)

오치남 남도일보 주필

구순(九旬·90세) 촌로(村老)는 오늘도 지팡이를 짚고 태풍 ‘힌남노’로 반쯤 쓰러진 벼논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제대로 가을걷이나 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자식들의 말을 듣지 않은 걸 후회한다. 해마다 더 이상 벼농사를 짓지 말라는 간곡한 부탁도 소용없었다. 농업직불금과 농민수당이라도 조금 받아볼 요량으로 집 앞 다랑이논에 볍씨를 뿌렸다. 자식들 걱정할까 봐 농사짓는데 전혀 힘이 들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냥 볍씨만 뿌려 놓고 내버려 두면 저절로 수확할 수 있단다. 당신이 개발한 쉬운 농사법이란다. 못자리나 모내기를 하지 않고 논에 직접 파종하는 직파재배법이다.

비료나 농약을 자주 사용하지 않아 수확량이 많지 않다. 가을에 산물벼로 수매해도 손에 쥔 돈은 몇 푼 안 된다. 콤바인 사용료와 인건비, 농약값과 비료대를 빼면 본전치기도 버겁다. 매년 거의 비슷하다. 그래도 벼농사를 포기하지 않는다. 천생 농사꾼이다. 농사 포기는 곧 삶의 포기다. 자식들이 옹고집 좀 그만 부리라고 하지만 구십 노친의 마음은 바뀌지 않는다. 우리 아버지의 모습이다. 아니 전라도 모든 농촌 어르신들의 자화상이다.

농촌 들녘이 갈수록 누렇게 물들고 있다. 올해도 태풍 피해가 그리 크지 않아 풍년이 예상된다. 하지만 45년 만에 쌀값이 최대 폭으로 떨어지면서 농촌 붕괴 위험마저 우려되고 있다. 민주당 서삼석 의원이 전국쌀생산자협회의 ‘2022년 생산비 조사 자료’를 토대로 쌀 1㎏으로 환산한 결과, 2천83원의 생산비가 투입된다. 반면 지난 15일 산지 쌀값은 ㎏당 2천36원에 불과해 47원의 손해가 난다. 밥 한공기(쌀 100g 기준) 분량이 204원에 팔리는 셈이다. 농사 투입 비용 208원도 못 건진다. 한 끼를 해결해주는 밥 한공기값이 껌값보다 못하는 비참한 현실이다.

국내 식량안보 기반도 흔들리고 있다. 민주당 신정훈 의원이 농림축산식품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 분석 결과, 우리나라의 2020년 곡물자급률은 20.2%로 2016년 23.7% 이후 매년 하락하고 있다. 같은 기간 식량자급률도 50.8%에서 45.8%로 떨어졌다. 반면 사료용을 포함한 수입률은 2016년 78.4%에서 2020년 80.5%로 수입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다. 우리나라 세계식량안보 지수는 2016년 28위에서 지난해 32위로 추락했다. 식량 무기화 위험에 직면해 있다.

전남·북, 경남·북, 충남·북, 경기, 강원 등 전국 쌀 주산지 8개 도지사들도 지난 15일 국회에서 쌀값 안정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산지 쌀값이 세 차례 시장격리에도 지난해 10월 5일 22만7천212원(80kg 기준)을 기록한 이후 지속적으로 하락, 이달 초 기준 16만4천470원으로, 2018년 이후 처음으로 17만원선이 무너졌다고 주장했다. 도지사들은 지난 20년간 쌀 생산비 상승률을 감안해 최소한 21만원대가 유지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결국 당정이 지난 25일 폭락한 쌀값 안정을 위해 역대 최대 규모인 45만t의 쌀을 시장 격리 조치하기로 했다. 하지만 곤두박질한 쌀값을 회복시킬지 여부는 미지수다. 전농 광주·전남연맹도 농민들이 요구한 가격안정 대책에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연맹은 시장격리곡을 밥 한공기 300원 기준으로 매입할 것, 신곡 매입물량은 정부 발표보다 최소 50만t 이상 늘릴 것, 40만8천t의 수입쌀 시장격리, 농협 보유 2021년산 최저가 낙찰제 매입 철회 등을 요구했다.

쌀값 폭락과 관련, 전국이 들끓어도 ‘농도(農道)’ 전남지역 농촌 어르신들은 그리 큰 욕심이 없다. 쌀농사가 흔들리면 농민의 삶은 물론 대한민국 식량 주권도 위협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시장 격리 조치나 쌀 매입 의무화를 골자로 한 양곡관리법 개정 등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오직 지긋지긋한 보릿고개를 넘어 지금의 대한민국 건설에 앞장선 아들과 딸, 손자와 손녀를 키웠다는 자부심 하나로 살고 있다. 평생 삶의 터전인 농업·농촌이 사라지는 것은 죄악으로 여기고 있다. 우리 어르신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농업·농촌이 더 이상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줘선 안 된다. 자존심은 지켜줘야 한다. 희망고문일까? 민생보단 강 대 강 대치국면으로 치닫고 있는 여야 정국에서 올 가을에도 여전히 해법 찾기가 힘들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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