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자(동화작가)

                                                              이성자 동화작가

6월의 그날, 귀순 씨는 딸을 등에 업고 부랴부랴 방공호로 숨어들었다. 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겨우 비집고 들어갔는데, 등에 업힌 딸이 답답한지 칭얼대기 시작했다. 주변의 눈총이 따가웠지만 그대로 버티고 있었다. 아이가 등에 얼굴을 비벼대며 울기 시작했다. “그러다 우리 다 죽겠어요.” 누군가의 간절한 말에 귀순 씨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방공호를 나와 피난 가는 사람들 맨 뒤에 따라 붙어서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눈앞에 개울이 보였다. 열아홉 시집올 때 친정어머니가 만들어준 무명버선이 물에 젖을 것 같아 벗으려고 잠시 고개를 숙였다.

피융, 그때 총알이 귀순 씨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만일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면 머리에 정통으로 맞고 쓰러졌을 것이다. 두려움에 온 몸을 떨면서 피난 줄 맨 뒤를 따라갔지만 점점 뒤쳐졌다. 결국 총을 든 북한 정찰병에게 잡히고 말았다. 북한군은 등에 업힌 아이를 힐끗 바라봤다. “요것 보라. 내가 누군지 알고 웃지비?” 북한군이 아이 등을 툭 건드렸다. 이번에는 아이가 더 크게 웃었다. “내레 니 아부지 아니고마.” 북한군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얼른 저쪽으로 사라지라우.”하면서 귀순 씨 등을 밀었다. 다행히 마을로 쳐들어오는 북한군과 반대 방향의 숲이었다.

귀순 씨는 정신없이 도망을 가면서도 그 북한군이 생각났다. 명령을 받고 전쟁터에 나왔지만, 고향에 남아있을 가족이 생각나서 차마 죽이지 못했을까? 아니면 아이의 웃음 때문이었을까? 잠시 후 정신이 들자 목숨을 살려준 그에게 보따리에 들어있던 주먹밥 한 개라도 꺼내서 건네주었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가 일었다. 두려움 때문에 주먹밥은커녕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던 게 두고두고 안타까웠다. 귀순 씨는 그 북한군이 죽지 않고 살아서 고향의 가족들과 언제까지나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빌고 또 빌었다.

위 이야기는 내 어머니가 6·25 전쟁 때 겪었던 실화다. 그 후 어머니는 팔순이 지나 치매에 걸려 있을 때도 그 북한군 이야기만은 선명하게 기억해내곤 하셨다. 조용히 누워 계시다가도 뉴스에서 전쟁 이야기가 나오면, 벌떡 일어나 안 된다고 소리치곤 하셨다. 어머니가 하늘나라로 떠나신지 오래되었지만 지금도 “전쟁터에 나온 군인들은 이쪽이든 저쪽이든 다 소중한 목숨들이여, 그러니 전쟁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된다니까!” 손까지 흔들어대며 소리치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런데 어제도 오늘도 뉴스를 통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의 참상을 접하고 있다. 전쟁터에서 쓰러지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젊은이들, 모두가 귀하고 소중한 사람들인데 전쟁터에서 이처럼 허무하게 사라지다니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부모의 손을 잡고 피난길에 오른 아이들, 부모를 잃고 홀로 남아 울고 있는 아이들이 눈에 밟혀 가슴이 울렁거린다. ‘세계 3대 곡창지대’로 불리는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땅은 폭격으로 처참하게 무너지고, 오래된 도시는 흔적도 없이 파괴되고 말았는데도 두 나라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어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뿐이랴. 오늘도 대량살상무기인 북한 핵이 우리 머리 위를 향하고 있으니, 우리 역시 6·25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 더 나아가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소리 없이 일어나는 각종 산업 전쟁이나 자원 전쟁과 같은 여러 유형의 전쟁도 일어나고 있다. 이 모든 전쟁을 철저히 대비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뛰어난 애국적 지도력과 정치인들의 오만하지 않은 나라사랑, 그리고 국제 정세를 바로 볼 줄 아는 밝은 혜안도 필요할 것이다. 물론 국민 각자의 마음가짐과 책임감도 절실하다고 여겨진다.

호국보훈의달 6월의 끝자락에서 다시 한 번 경건한 마음으로 묵념을 올린다. 6·25 참전용사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기리며, 그 유가족들에게도 깊은 위로를 전한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이 하루빨리 끝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