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제(남도일보 대기자)

 

김갑제 남도일보 대기자

다시 광복절을 보내며 ‘토착왜구’(土着倭寇)라는 낱말을 곱씹어 보았다. 요즘 너무도 또렷하게 친일을 일삼는 발언과 행동들이 넘쳐 나서다. 혹시 작금의 현상이 토착왜구들의 조직적이고 치밀한 계획에 의한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토착왜구란 일본이 아닌 곳에 살면서 왜구의 편에 서서 이득을 취하거나 일본 군국주의를 추종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설마 했지만 합리적 의심을 갖기에 충분했다. 놀랍게도 ‘소화국쇄연감’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에 와서 살던 일본인은 265만 명이나 됐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전까지 남한에 187만, 북한에 78만 명이 살고 있었다. 북한에 상대적으로 적은 인구가 살았던 것은 일본으로부터 거리도 멀고 춥고 척박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해방 후에 일본으로 돌아간 일본인들이 최대 131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나마 77만 명은 북한 측 일본인이다. 북한은 해방 후 공산주의 사회가 되어 남는다 해도 자기 재산과 생명을 지킬 수 있는 보장이 어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한 땅 기록에서 사라진 133만 일본인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들이 과연 온갖 방법으로 수탈하여 축적했던 재산, 집과 땅 부동산, 동산을 남겨두고 일본으로 돌아갔을까? 돌아가면 폐허만 남은 땅에 빈손 거지꼴로 살아갈 것이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모습도 한국인과 똑 같고 언어 또한 유창해 한국인으로서의 신분세탁은 식은 죽 먹기였다. 이승만 정부 또한 인적자원 확보를 위해 모든 것 보장한다며, 일본인들을 붙잡았다. 결국 그들은 오롯이 한국인으로 둔갑해 살아가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해방 78년이 흐른 지금 그들은 몇 명이며 어디에서 무슨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의문은 꼬리를 문다. 작금의 건국절 논쟁, 이승만 신격화 작업, 백선엽 친일지우기, 친일인사들의 독립유공자 서훈 검토 등등 말도 안 되는 역사논쟁이 시도 때도 없고, 부끄러움도 모르는 채 불붙고 있는 이유가 뭘까? 토착왜구 후손들의 조직적이고 치밀한, 그리고 계획된 행보는 아닐까? 광주, 전남·북에서 식민지 사관 논쟁으로 총소리 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이유 또한 토착왜구 후손들 때문은 아닐까?

문제의 심각성은 또 있다. 지금 해외의 독립운동사도 지워질 위기에 봉착해 있다.

중국 흑룡강성과 요녕성, 길림성 등 동북 3성은 우리나라 해외 독립운동사의 살아있는 현장이다. 지금도 우리 동포들이 조선족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산 민족사의 진행형인 땅이기도 하다. 나는 십 수 년 전부터 거의 매년 학생과 교사는 물론 뜻있는 시민들과 함께 답사를 해 왔다. 이름 있는 역사학자들의 엄정한 고증을 통한 현장 교육을 기본으로 삼았다.

일제 침략과 강점에 맞서 실제 조직적이고 결사적인 전투를 벌인 군대나 단체는 한말호남의병을 비롯한 대한제국기의 의병과 만주 독립군이 대부분이었다는 사실은 답사의 당위성을 웅변해 준다.

올해도 (사)한말호남의병기념사업회와 안중군의사기념사업회 광주전남지부, 진정한 광복을 바라는 시민의 모임이 주관하고 참여하여 초중고 교사와 대학교수를 비롯한 각계 지도자 30명으로 구성된 답사단은 광주광역시의 후원으로 지난 3일 새벽 4시 광주광역시청 앞에서 5박 6일의 대장정에 올랐다.

그러나 사실 출발하면서부터 개운치가 않았다. 한중 관계가 악화되면서 현장 답사가 어려울 것으로 전망됐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야했다. 중국에서의 우리 독립운동사가 얼마만큼 왜곡되고 변해가고 있는지를 직접 확인하고 기록하여 후세에게 남겨주는 것도 주어진 소명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청산리 대첩비가 자리한 청산리 근처에는 접근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봉오동도 마찬가지였다. 봉오동 저수지라고 쓰여진 입구까지 갈 수 있었고, 홍범도와 최진동이 일군을 몰살시킨 삿갓봉은 멀리서도 볼 수 없었다.

두만강이 흐르는 도문시에서는 눈앞의 북한 남양시 전경도 제대로 촬영할 수 없었고, 예전에는 허용됐던 조중간의 국경 다리 걷기도 중국인만 허용될 뿐이었다.

윤동주의 고향 명동촌에서는 더욱 시린 가슴을 쓸어 내야 했다. 동네 주차장까지는 입장이 가능했지만, 윤동주 생가, 명동학교 기념관은 주먹 같은 자물쇠가 기다리고 있었다. 용정중학교, 이상설이 세운 우리민족의 최초의 교육기관인 서전서숙 터도 담장 너머로만 구경해야 했다.

연길시에서 6시간의 고속열차를 타고 도착한 대련의 여순 감옥은 공개는 하고 있으나 안중근 기념관은 폐쇄해 버렸다. 기념관 실내에는 이회영, 신채호 선생 등 여순 감옥에서 순국한 우리나라 독립운동지도자들의 흉상이 있어 묵념으로 그 숭고한 넋을 기렸으나 이제 그마저 중단되고 말았다. 언제 다시 참배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분노와 탄식으로 일정을 마쳐야 했다. 안중근의사께서 사형선고를 받았던 재판소 엣 터 영정 앞에서 하얀 국화 한 송이씩을 바친 것으로 아프고 시린 마음을 달랬다.

도대체 어찌 이런 역사적·문화적 참사가 계속되고 있는 것인가? 1천만이나 된다는 토착왜구들의 조직화된 독립운동사 지우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인가? 광복 78주년의 아침이 공허하고도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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