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제(남도일보 대기자)

 

김갑제 남도일보 대기자
김갑제 남도일보 대기자

1992년 여름. 한중수교로 대륙의 문이 열리면서 느닷없이 중국에서의 한민족 독립운동을 취재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5년차 사회부 기자에게 적성국인 중국으로 직접 가서 독립운동사를 취재하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기가 막혔다.

왜 저입니까? 하고 물으니 편집국장 왈 “독립투사 후손으로서 독립정신을 발휘해 만주 독립군 역사를 취재할 사람은 너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진심인지 어르는 것인지를 몰라 한숨만 내쉬다가 “아무리 공산국가라지만 거기도 사람이 사는 곳이다. 그래 해보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는 생각으로 준비를 시작했다. 모든 게 깜깜했지만 알음알음으로 전남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연변대학교 교수와 연결된 것은 그나마 행운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연길에 도착해 맨 처음 찾은 곳이 봉오동 전투 현장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출입이 금지된 군사보호지역. 가이드 역할을 해주는 역사전공 교수들을 설득해 잠행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터만 남은 상·중·하리(上·中‥下里)와 별로 크지 않은 봉오동 저수지를 지나 봉오동 전투의 현장인 삿갓봉까지 4시간여를 돌아다녔다. 삿갓봉아래 분지는 우리 독립군들이 일본군을 몰살시킨 역사적인 장소다. 지금은 주암호 같은 봉오동 저수지 건설로 수몰된데다 아예 입구부터 출입을 막아버려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는 땅이 돼버렸다.

나는 그렇게 홍범도를 처음 만났다. 기쁨과 감격도 잠시, 봉오동 답사를 마친 우리는 현장을 빠져나오다 산림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하얗게 질린 연변대 교수들을 보면서 나는 본능적으로 위기임을 직감했다.

서슬이 퍼런 산림경찰이 나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조선족 경찰에게 사정을 설명했더니 그는 정말 남조선에서 왔느냐고 묻고, 여긴 왜 왔느냐고 다시 물었다. 당시 연변에서의 대한민국은 남조선으로 통했다. “우리민족의 가장 찬란한 독립전쟁 현장을 보고 싶어서”라고 했더니 기가 막힌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빼앗은 카메라를 돌려주면서 “가시오”라는 짧은 말로 풀어주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만약 경찰서까지 연행됐다면 최소한 구류 보름은 살아야 하고 재수 없으면 간첩협의까지 받는 것은 물론 동행한 연변대 교수들의 신변문제도 거론될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런저런 어려움 속에 두 번에 걸친 중국 취재를 마치고 1년 동안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비사’를 연재했다. 하지만 그 후로도 해마다 홍범도에 대한 대장정은 계속됐다. 중국 목단강에서 왕복 꼬박 하루 걸리는 밀산, 연해주 블리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상트 페테르부르크, 카자흐스탄 알마티. 크즐오르다 등 홍범도가 자취를 남긴 곳이라면 답사를 주저하지 않았다.

물론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신채호, 김좌진, 이회영, 김구, 조소앙, 안창호, 서일, 나철 등 홍범도 못지않은 훌륭한 독립운동가들도 많다. 그분들의 사적지도 빼놓지 않고 답사했다. 그들의 정신, 그들의 발자취를 공부하고 전하는 것이야말로 민족정기를 살릴 수 있는 기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국과 러시아 연해주, 카자흐스탄 등지에서 독립운동사를 취재하며 나는 홍범도에 대해 세 번이나 놀랐다.

우선 그가 삼수갑산에서 포수생활을 했던 의병장 출신 독립군 지휘관이었지만 지략과 전투력은 세계적인 장수반열에 올라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의 군사 활동은 의병 독립군 할 것없이 가장 오랜 기간에 걸쳐 가장 큰 전과를 올렸다. 봉오동, 청산리의 6회에 걸친 대첩 중 어랑촌 백운평 전투에서의 대승이 이를 단적으로 입증한다.

그가 무식하다는 속설도 전혀 사실이 아니다. 연해주 우스리스크 한 기념관에는 홍범도와 의병장이며 유학자인 의암 유인석과 나눈 한자 서신이 전시되어 있다, 의병 봉기를 논하는 편지였는데, 깜짝 놀랄 만큼 글과 글씨가 논리정연했다. 마지막으로 그가 활동했던 모든 지역민들과 현지인들이 지금까지도 존경과 사랑을 변치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민족이야 그렇다손치더라도 이방인들까지 기억하고 추모한다는 것 자체가 신비롭기까지 했다.

한민족은 물론 이방인들까지 그토록 존경하고 사랑하는 불멸의 영웅 홍범도가, 지금 부관참시 당할 위기에 처해있다. “소련공산당 가입 및 활동 이력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누차 강조했지만, 당시 홍범도 등 독립투사들은 좌우 어느 진영하고도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서라면 손잡았다. 어느 쪽에 가담하든 독립운동의 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당시 소련은 미국 등과 함께 연합국의 일원이기도 했다.

특히 홍범도는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쫓겨나 말년에는 극장의 경비 노동자로 고단한 여생을 살았다. 소련 공산당에 입당해서 얻은 이익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자유시참변 당시 홍범도가 독립군 살상에 참여했다는 주장도 전혀 근거가 없고, 빨치산 이야기도 억지다. 빨치산은 비정규군이라는 뜻으로, 일제강점기에는 독립군이나 의병을 지칭하는 의미다.

누구든 역사를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일본제국주의와 싸웠던 엄연한 역사적 사실마저 왜곡해서야 어찌 제대로 된 나라라 할 수 있겠는가. 또한 명심하기 바란다. 중국의 진시황이 학자들의 정치적 비판을 막기 위해 의약, 점복, 농업에 관한 것을 제외한 민간의 모든 서적을 불태우고 유생들을 생매장시켰다. 그 폭정으로 역사가 지워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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