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산 행주기씨(幸州奇氏) 고봉선생종가
[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조선성리학 큰 산맥, 기대승 선생 가문
하서 등 교유 사단칠정론·이기론 정립
고봉-퇴계 현대인에게 화합 정신 귀감
사화 피해 장성·광주에 입향한 기묘명현가
대대로 학자 배출·기록유산 가치 높여

황룡강 강변 백우산 기슭 광곡(너브실)마을에는 기대승(1527~1572, 호는 고봉)선생과 박상·박순·김장생·김집 등 조선의 대학자·명신을 기리는 월봉서원이 있다. ‘빙월당(광주광역시 기념물 제9호 )’과 ‘고봉문집목판(유형문화재 제19호)’이 보존된 유서 깊은 서원이다. 서원과 종택에 수백년 보존한 종가소장문적은 1994년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됐다. 종가는 최근 그동안 보존했던 편지·경서·고문서 등 비지정자료 1천여점을 한국학호남진흥원에 기탁해 연구토록했다. 이처럼 종가는 보물창고다. 보배 가득한 창고를 개방한 광주광산 행주기씨 고봉선생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 본다.
 

월봉서원 전경
월봉서원 전경

◇16세기 조선유학의 르네상스 이끌다

행주기씨 13세 기진의 둘째아들 기대승은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했으며, 1559년부터 8년에 걸쳐 이황의 이기이원론, 주리설에 맞서 주정설과 주기설을 주장하여 유학사상에 영향을 준 사단칠정 논변으로 유명하다. 정조는 기대승선생을 기리며 ‘빙심설월(氷心雪月 눈내리는 달밤의 얼음처럼 맑은 마음)’에서 이름을 차용해 월봉서원 강당을 ‘빙월당’이라 부르게 했다. 월봉서원 빙월당 뒤 장판각은 고봉선생문집 15책 목판본을 보존한 곳이다. 고봉집에는 명종과 선조에게 강론한 내용이 ‘논사록’ 상하편으로 수록됐다. 1665년 효종이 보낸 제문은 고봉을 향한 후대 임금의 그 절절한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그대의 정신은 잘 단련된 금과 같고 윤택한 옥과 같고 맑은 수월과 같고 결백한 빙호와 같도다. 가정에 이어오는 좋은 교훈을 받았고, 학문은 정자와 주자를 본받았도다. 기운은 일세를 풍미했고, 학문은 천만가지를 꿰뚫었도다. 널리 배워 요령을 얻었으니 체용을 함께 갖추었도다. … 문정공 조정암(조광조)선생이 돌아가신 뒤로 도(道)가 황폐해졌으니 도산(이황)에서 계승하여 창도했는데 진실로 뿌리와 줄기가 되었다가, 경(기대승)께서 도와 좌우로 접하여 바른길로 인도하였도다. 덕은 이웃이 있으니 사문이 외롭지 않도다.”
 

월봉서원 장판각
월봉서원 장판각

1788년 정조는 제문에 “이기(理氣)의 근원과 전례의 상변을 명쾌하게 분석하였으니 선배도 두려워 하였다”며 논사록을 거듭 발간토록 했다. 고봉선생의 학문과 사상은 조선의 제왕들은 물론 성리학적 이상국가를 지향하며 학덕을 갈고 닦은 문무명신들에게 영향을 끼칠만큼 귀중히 다루고 있다.

편지 120여통은 ‘양선생왕복서’, ‘양선생 사칠이기왕복서’로 묶여 고봉집에 담겨있다. 편지는 고봉 기대승과퇴계 이황, 양선생이 1559년부터 8년간 주고 받은 사단칠정론에 관한 철학 편지로서 3책이 1614년에 간행됐고, 1788년(정조12년)에 중간 간행됐으며 이기왕복서 상하1책은 정조 때 사칠속편을 간행했고 1907년에 목판 완질본으로 출간한 것이다.

1558년 문과에 입격한 기대승(당시 32세)이 58세의 대가인 이황을 서울자택에서 만나 처음으로 사단칠정설에 대해 논의했다. 과거를 보러 올라가기 전에 일재 이항과 논변했던 태극설에 대해 장성의 하서 김인후를 방문해 논의하고 동의를 확인했다고 한다. 이듬해에 퇴계에게 보낸 기대승의 질의서(첫 편지)는 교류하는 학자들과 함께 의견을 조율한 당대 철학사상의 학문적 진수를 담고 있다. 1568년 무렵 기대승(42세)이 대사성이 되어 낙향하는 퇴계선생을 만나 봉은사에서 숙박하고 시를 주고 받았다. 이렇게 편지를 통한 학문적 교유는 김인후·이항·정지운·노수신·김계·김점 등 16세기 명현들이 도의를 강구하는 논변으로 확대됐다. 16세기 조선의 르네상스는 편지로부터 거대한 학문사상의 파도가 돼 퍼져나갔다. 그의 사상은 사칠논변을 비롯해 경학사상, 윤리사상, 경세사상, 교육사상, 예학사상, 문학사상 등 분야마다 기틀을 다졌다고 한다.
 

빙월당
빙월당

◇기묘사화 피해 남도 입향한 행주기씨 가문

행주기씨는 고려 인종 때 문화평장사 기순우를 중시조로 모신다. 그의 아들 기수전도 문화평장사를 역임했다. 고려말 신돈에게 화를 입은 7세 기현의 증손자 기건(1390~1460)이 가문을 중흥시켰다. 10세 기건은 세종에 발탁되어 호조참판에 오르고, 청백리에 녹선됐다. 단종조 대사헌을 지냈으나 세조가 즉위하자 은거해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기건의 손자인 12세 기찬은 문과 급제해 홍문관 응교를 역임했다. 기찬의 다섯 아들이 기형, 기원, 기괄, 기진, 기준이 가학을 발전시켰다. 장남 기형이 사마양시에 급제해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5섯째아들 기준은 조광조의 제자로 홍문관 정자와 시강관을 역임하고 기묘사화에 화를 입은 기묘명현이다. 둘째아들 기원과 넷째아들 기진이 기묘사화의 화를 피해 남도의 장성과 광주 일원으로 내려와 장성문중과 광주문중을 이루며 호남에서 학문과 충절의 전통을 대대로 잇게한 입향조다.기진의 둘째아들이 기대승선생이다. 기대승의 아들 기효증(1550~?, 호는 함재)은 김덕령과 함께 담양에서 의병1천명을 모아 왜군을 물리쳤으며 선조가 있는 의주행제소까지 군량 3천석을 수송하고 군기시첨정 벼슬을 사양하고 귀향했다. 19세 기언관(1706~1784, 호는 국천재)과 기언정(1716~1797, 호는 나와) 형제가 문과 급제해 개성경력과 동부승지를 역임하며 청백리 가문의 뒤를 이었다. 20세 기학경(1741~1809, 호는 겸재)은 문과 급제해 교리를 역임했다.
 

한국학호남진흥원에 기탁한 종가소장자료 1천점 / 한국학호남진흥원 사진제공
한국학호남진흥원에 기탁한 종가소장자료 1천점 / 한국학호남진흥원 사진제공

◇고봉-퇴계 편지 추가기탁 보존 노력

기대승-이황, 양대 학자간 학문교유의 역사적 교훈과 가르침은 지역갈등으로 몸살을 앓던 1990년대 이래로 매우 중요한 영호남화합의 아이콘이 됐다. 1993년 서울시장 조순이 신도비문을 지었다. 김병일 월봉서원 원장은 도산서원 원장까지 겸직하며 영호남 정신문화의 가교를 잇고 있다. 철학자의 길, 살롱드월봉 등 프로그램을 통해 교육하는 서원으로 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2014년부터 3년간 월봉서원은 문화재 활용 우수 기관으로 운영돼고 있다. 종가 종손 기성근씨는 올해 두번이나 가문의 보배인, 편지와 고문서 등 비지정자료 1천백여점을 기탁하며, 선조의 학덕을 계승하고 문화재 보존의 가치를 높이는데 앞장서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월봉서원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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