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상산김씨(商山金氏) 영중추공파 종중/종가
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고려 보윤 김수 시조로 모시는 천년 명족
영중추부사 김운보 파조로 문무명신 배출
국난엔 창의 거병·향촌엔 백성 살펴 선정
선비에게 사표되는 선조 행적 계승 힘써

수산사
수산사

전남 장성 삼서면 수양리에는 이 일대 농사에 큰 힘이 되는 저수지 ‘수양제’가 있다. 언제 어떤 인물들이 만들고 가꿨는지 수양제와 같은 수자원이 인근 4개군 경계를 넘어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고 있다. 이 마을에 터잡고 장성·영광·함평·광산까지 세거지를 넓히며 23세대 이상 전통을 가꿔 온 명문집안이 있다. 명궁 무예, 제갈량 지략을 갖춘 무인 선조들과, 장원 문장 학덕에 청백리 품성을 가진 명신 선조들을 비롯한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하며 천년 가문을 구현한 장성 상산김씨 영중추공파 종중/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 본다.

 

◇신라 김씨 후예·경상도 상주가 본관

장성 상산김씨는 고려 초 보윤을 지낸 김수를 시조로 모신다. 김수는 신라 경순왕의 후예로 신라국성에서 분파한 내력을 가졌고, 그가 경상도 상산(상주 옛이름)을 관향으로 삼아 천년 가문 상산김씨의 명성과 전통을 잇고 있다. 그의 아들 김도는 보윤대장을 역임했고, 손자 김식(시호는 정정)은 시중을 역임하고 가문을 일으켰다. 김식의 큰아들 김희일(시호는 청평)도 시중을 지내고 상산군에 봉해졌다. 김희일의 아들인 5세 김문도와 김비궁이 각각 시강원 한림학사, 문화찬성사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김비궁은 문화찬성사로 벽산공신에 오르고 상산부원군에 군봉됐다. 6세 김치화는 정당문학·첨의평리·예문관대제학을 역임했고 아들 김우를 비롯한 4형제가 문과급제했다. 8세 김충은 고려 원종 때 중랑장으로 왜적을 토벌한 공을 세워 오성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지략이 ‘관중·제갈량과 같다’고 동국사기에 전한다.

김충의 아들 김자송과 손자 김언은 충숙왕 때 무관으로 각각 중랑장과 별장을 지냈다. 김언의 아들인 11세 김운보(1333~1402, 호는 죽헌)는 중랑장으로 왜적을 토벌하고 경성 수복 전투에서 공을 세워 공민왕에게 전답토지와 공적비가 내려졌다. 조선이 건국되자 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에 임명됐다. 중국 황제에게 ‘삼’이라는 이름도 하사받았다. 장성 영사재에서 추모한다. 그가 영중추공파를 열었다.

 

◇탁월 무예·통달 지략, 못다 펼쳐

12세 김덕생(호는 증산, 시호는 충간)은 말과 활을 잘 다뤄 무과 급제한 무장으로, 사냥터에서 이방원을 습격한 표범을 쏘아죽인 공으로 태조로부터 말을 하사받았고, 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는 공을 세워 익대공신이 됐다. 함평 증산사에서 추모한다. 그의 동생 김우생(1372~1457, 호는 양산)은 정몽주에게 수학해 9경4서에 통달하고 음사로 벼슬해 동부승지에 올랐다. 열일곱살인 그는 최영장군이 요동정벌을 강행하려하자 이성계에게 강행의 불가론을 역설했다고 한다. 그는 형 김덕생이 투기와 누명으로 화를 입자 벼슬을 사직했다. 단종조에 동부승지에 제수됐으나 사퇴했다가 단종의 사망 소식을 듣고 음독 자결했다. ‘가례연의’와 ‘훈몽요어’를 남겼고 광주 화암사에 배향됐다.

김덕생의 아들인 13세 김중명(1400~1458)은 음사로 담양부사 겸 전라병마절도사를 역임하며 백성을 자식처럼, 선비를 아우처럼, 관리를 수족같이 대했고, 낮에는 농상을 장려하고 밤에는 학문에 힘쓰며 백성을 살펴 청백한 선정을 베풀었다고 알려졌다. 관직을 떠나서는 어부와 나무꾼과도 문답하며 깨우쳐 주었고, 함평 나산에 입향해 향리 백성의 고난을 살펴주니 고을 선비들이 가르침을 따르는 등 선비의 사표가 됐다고 한다.

 

영사재 전경
영사재 전경

◇반도 곳곳 의로운 선조의 발자취

16세 김수정(1450~?)은 명궁 무신으로 사헌부감찰로서 편전시험에 장원했다. 경상우도절도사로 진도에 출몰한 왜적을 방어했고, 경상우도·전라우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했다. 17세 김몽희(1543~1601, 호는 경봉)는 무과 급제해 부사과가 됐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몽서(동생), 김천일, 고경명 의병장과 뜻 모아 조헌 진영에 합류해 청주에서 왜적을 토벌하고 금령전투에서 승전했다. 병조정랑에 제수됐고 2차 금산전투에서 순절해 선무원종공신록에 올랐다. 17세 김남수(1561~1597, 호는 운파)는 무과에 급제하고 벼슬은 선전관, 좌영호군을 역임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응종, 김춘수(형)와 장성 남문창의에 참여해 김천일 의병군에서 활약하다 어가를 보호하기 위해 의주로 향하던 중 금강에서 왜적을 만나 순절했고 영광 수성사에 배향됐다. 17세 김형진(1556~1592, 호는 석천)은 임진왜란에 의병창의해 조헌 휘하에서 싸우다 금산전투에서 7백 의사와 함께 순절했고 석천집을 남겼으며 사헌부감찰에 추증되고 금산 종용사, 장성 수산사에서 추모한다. 22세 김득원은 용양위대호군을 지내고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분무원종공신에 녹선됐다. 24세 김우해는 문과에 장원급제해 정조로부터 충효장원이란 글을 하사받았으며, 예조좌랑, 충청도사를 역임했다. 25세 김상유는 무과 급제해 선전관, 중추원도사, 전라도 좌수군우후에 올랐다.

 

금산 종용사에 모셔진 의사들 이름. 김형진이 종용사에 모셔져 조헌과 함께 순절한 700의사 중 한사람이라는 점을 말해 주고 있다. / 홈페이지 캡쳐 이미지
금산 종용사에 모셔진 의사들 이름. 김형진이 종용사에 모셔져 조헌과 함께 순절한 700의사 중 한사람이라는 점을 말해 주고 있다. / 홈페이지 캡쳐 이미지

◇목숨바쳐 나라 세운 ‘그 뜻 우러러’

26세 김찬순(호는 의암)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장성 삼서면 일대에서 100여명을 규합해 김준·전기홍 등과 거의하고, 일본군과 교전해 전과를 올렸고, 기우만 의병장의 순국후 호남의진을 재규합해 연합의진의 대장, 도통장으로 활약했다. 삼서면 금강천변에서 일본군에 포위돼 순절했고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다. 28세 김기봉은 1907년 호남창의회맹소에 참여해 안현전투에서 순절하고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된 애국지사다. 후손들은 종중을 중심으로 수산사를 비롯한 문화유산을 보존하며 가문의 충절정신 계승에 힘쓰고 있다. 상산김씨는 ‘잠훈’이라는 가르침을 대대로 실천하고 있다. “계림의 신령에 근원하고 / 상산의 오래된 문벌이라 / 집에 글과 예를 전하고 / 대대로 두텁고 화목함을 지켜라. / 효도하고 공손하고 신실하며 충성하고 / 삼가 부지런하며 청렴하고 정직하라. / 선조의 벼슬이 빛나 동방에서 우러러 보는 종족이니 / 힘써 변치 말지어다. / 천억년이 지나도록”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오성사 현판
오성사 현판
수산사 전경1
수산사 전경1
영중추부사 김운보 공적비
영중추부사 김운보 공적비
오란호국충혼탑. 이순신장군이 말한 ‘약무호남시무국가’는 국난이 있을 때마다 분연히 일어나 나라지킨 광주전남의 의로운 백성들이 있었기에 나라가 지켜졌다는 선언적 명제다. 임진왜란,병자,정묘호란, 이괄의난, 이인좌의난 등 5란에 활약한 인물들을 기리는 충혼탑이 담양 창평에 조성돼 있다.
오란호국충혼탑. 이순신장군이 말한 ‘약무호남시무국가’는 국난이 있을 때마다 분연히 일어나 나라지킨 광주전남의 의로운 백성들이 있었기에 나라가 지켜졌다는 선언적 명제다. 임진왜란,병자,정묘호란, 이괄의난, 이인좌의난 등 5란에 활약한 인물들을 기리는 충혼탑이 담양 창평에 조성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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