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제주양씨(濟州梁氏) 학포공파 건계공종가
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성리학적 개혁정치 기묘명현 양팽손 후손
실사구시·탕평정치 이끈 양득중 가통이어
민족대표 양한묵 “독립 계획은 한국인 의무다”
실사구시 역사마을 조성으로 정신계승 힘써

양한묵 생가 전경

전남 해남 옥천 영신마을에는 옛 서대문형무소를 닮은 기념관이 있다. 3·1독립운동의 민족대표였던 지강 양한묵 선생의 생가 기념관이다. 그가 이 마을에서 나고 자라 민족대표 33인 중 유일한 전라도 사람이고 또 유일하게 옥중사망했기 때문에 이 마을에 그의 생가를 복원하고 그가 사망한 서대문형무소를 모사한 건물로 기념관을 지었다고 한다. 민족의 횃불로 옥중 산화한 양한묵 선생의 가문 해남 제주양씨 건계공종가를 찾아 절의와 개혁을 추구한 가문의 전통과 인물 행적을 살펴본다.

양팽손 그림과 행적으로 만든 소심재 병풍

◇기묘명현 계승해 나라지킨 인재양성
제주양씨는 탐라를 세운 양을나를 시조로 모시고 고려 유격장군 양보숭을 중조로 세계를 잇고 있다. 중조 양보숭의 11세인 양팽손(1488~1545, 호는 학포)은 송흠에게 학문해 생원시에 장원하고 문과 급제했으며 학덕으로 현량과에 발탁돼 정언·전랑·수찬·교리 등을 역임했다. 조광조의 개혁정치를 옹호하며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소두가 돼 앞장서 상소했고 삭직당해 화순 쌍봉으로 낙향해 학포당을 짓고 기준·박세희·최산두 등 명현들과 교유하며 학문연구에 매진했다. 조광조가 능주에서 사약을 받는 화를 입자 시신을 수습하고 장사지내는 의로운 행적으로 유명하다. 글씨와 그림이 탁월해 <산수도>, <춘강계칙도> 등 작품과 ‘학포집’을 남겼다. 그의 아들 8형제 중 셋째인 양응정(1519~1581, 호는 송천)은 전쟁 방비 남북제승대책이라는 책문으로 중시문과에 장원급제한 선각자다. 벼슬은 공조좌랑, 수찬, 진주목사, 공조참판을 거치는 중 모함으로 두번 파직 됐다 복직됐고 대사성에 올랐다. 그는 선조조 8대문장가로 알려졌고 광주(당시는 나주) 박뫼마을에 조양대와 임류정을 짓고 양성한 후학들이 16세기를 대표하는 인걸들이다. 이후백, 박광전, 백광성, 최경운, 최경장, 최경회, 정철, 백광훈, 정운, 신립, 양산숙 등에게 문장과 경학은 물론 병법까지 가르치며 전란에 대비토록 함으로써 충절을 바탕으로 국난 극복에 목숨 바친 구국의 기둥이 되게 했다.

건계재 영당 전경

제주양씨가 해남 옥천에 입향한 사연에서 당대 호남명사들의 교유 관계가 엿보인다. 양팽손의 손자인 13세 양산형(1545~1603, 호는 건계)이 정우의 딸 하동정씨와 혼인하여 처가인 해남(당시 영암)옥천면에 거주하게 됐다. 양산형은 양응정의 조카로서 백광훈의 처조카 하동정씨와 결혼했다. 그의 장인 정우는 임진왜란 이순신의 해전을 백전백승으로 이끈 정운장군의 사촌형제다. 백광훈과 정운은 양응정에게 수학한 동문지간이며 양산형과 함께 옥천에 거주하며 교분을 가졌다. 양산형의 손자인 15세 양도남(1607~1667, 호는 심하옹)은 장성 남문 창의 의병장 김경남의 손녀 광산김씨와 혼인해 옥천 대산리에서 영신(영계)마을로 이사하고 건계공종가의 세대를 잇게 했다. 그의 아들 양우회(호는 소심재), 양우주 3형제 중 셋째 양우주(1642~1694, 극복당)는 우산 안방준의 손녀 죽산안씨와 혼인해 양득중을 낳았다. 명사와 학자들이 의로써 교유하고 혼맥을 통해 전통을 잇는 계승의 소역사가 종가문화에 의해 드러나고 있다.

인재양성 학당 소심재 내부

◇낡은 제도 개혁 앞장선 선각자
양우회는 소심재를 짓고 학당을 열어 인재양성의 요람으로 삼았다. 그의 조카인 양득중(1665~1742, 호는 덕촌)은 이곳에서 자라 명재 윤증의 제자가 되고, 이세필과 박세채의 천거로 효릉참봉, 회인현감, 세자익위사 익위·위수·익찬, 김제군수, 사헌부지평·장령·집의를 거쳐 동부승지, 경연참찬관을 역임했다. 세자익위사에서 연잉군(훗날 영조)의 스승이 되고, 제위에 오른 영조에게 실학으로의 학문체계 개편을 건의하고, 탕평책으로 당파싸움 근절, 서원 폐단을 비판하고 수취체제 개선 등을 주장하며 송시열의 시책과 주장을 비판했다. 소론이었던 그의 주장을 영조가 받아들여 ‘실사구시’를 써붙이고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공식개혁서로 채택, 대중에게 간행하게 했다. 노론을 비롯한 당대 주도층의 주자학논쟁에도 불구하고 실학과 탕평책 등 정치개혁을 주창한 것은 양팽손, 양응정, 안방준 등 친가와 외가의 가학전통을 계승한 개혁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학의 아버지 유형원이 있게 하고 정약용 등 실사구시 학문이 정치 전면에 등장하게 한 양득중의 행적과 가통은 재조명이 필요하다며 후손들은 현창을 위해 힘쓰고 있다.

양한묵 생가 기념관 전경

◇“독립계획은 한국인의 의무” 
200여년 후 종가 후손인 23세 양한묵(1862~1919, 호는 지강)은 소심재에서 공부하며 자라 화순 능주 세무관이 됐으나 3년만에 사직하고 중국, 일본을 여행하며 손병희, 오세창과 인연을 맺고 일진회에 대항하기 위해 이준, 윤효정과 함께 공진회, 헌정연구회를 조직했다. 1909년 천도교 법도사가 돼 ‘대종정의’ 등 교리서를 저술하고 최초로 ‘인내천’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만인평등사상을 대중화하는데 기여했다. 이완용 암살미수사건의 배후로 지명돼 옥고를 치뤘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3·1독립선언을 채택하는 민족대표 33인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옥중에서도 “독립을 계획하는 것은 한국인의 의무다”라며 기개를 떨쳤고 고문 끝에 옥사했다. 그는 유일하게 옥중사망한 민족대표로서 건국훈장에 추서됐다. 종가와 후손들은 소심재 등 유적을 보존하며 실사구시 역사마을 만들기를 통해 선조의 정신계승에 힘쓰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서대문형무소 양식의 양한묵 기념관
양한묵 선생 흉상
양한묵 선생 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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