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장성 밀양박씨(密陽朴氏) 정혜공파 태양공종가

신라 왕족 밀성대군 박언침 중조 박언상 중시조
수양대군 총애받은 박연생 세조 즉위엔 담양 은거
3대 청백리 박수량 가문 부흥‥ 청백당 하사받아
박수량 생가 실전 위기 낙담‥‘종중 승락 無 매매’

[117]조선 청백리 명문가의 애환

청백한옥체험관 전경

전남 장성군청 입구의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이라는 표지석 옆에는 글자를 새기지 않은 하얀 비석이 있다. 수많은 군민과 공직자가 드나드는 행정관청 앞에 묘비(모형)가 세워져 있다. 한편 장성경찰서는 민원실이 있는 건물을 ‘박수량관’이라 명명했다. 묘비와 건물명의 주인공인 박수량은 황룡면 아곡리에서 나서 황희·맹사성과 함께 조선 3대 청백리로 알려진 인물이다. 명종이 하사한 그의 묘비 ‘백비(白碑)’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청백한 공직자를 상징하고 있다. 5백여년 동안 백비를 지켜 온 박수량 후손 태양공 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본다.

◇불의에 은거한 박연생 후손
박수량(1491~1554, 호는 아곡, 시호는 정혜)은 밀양박씨 돈재공파 파조인 박연생(호는 돈재)의 현손으로 장성 황룡 아곡리에서 태어났다. 장성 밀양박씨(密陽朴氏) 정혜공파는 혁거세를 시조로 모시고, 30세 밀성대군 박언침을 중조로, 그의 8세인 고려 도평의사사 박언상을 중시조로 모시며 세대를 잇고 있다. 박언상의 11세인 박연생은 충무시위사 대호군을 역임하며 수양대군의 환대를 받았으나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남쪽으로 내려와 담양 월산의 사위 이석손(호는 돈암)의 집에 은거했다. 세조가 공신녹훈을 주며 불렀으나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고 족적을 숨긴 후 태인박씨로 개관했다고 한다. 후손들은 태인박씨로 살다가 1831년 후손 박규혁 등의 상소로 밀양(밀성)박씨 돈재공파로 복관하게 된다.
돈재공파 14세인 박종원은 선략장군(증직) 박현손의 큰아들로서 박수량으로 인해 이조판서 겸 의금부도사를 증직받았다. 박종원의 둘째 아들인 15세 박수량은 효성이 지극하고 신중하며 예법을 잘지키는 문신으로 김개에게 수학해 문과급제했고, 벼슬은 광주향교 훈도, 승문원 부정자·박사· 정언, 호서도사, 고부군수를 거쳐, 사간, 보성군수, 사예, 군기시정, 춘추관편수관, 동부승지, 경연참찬관, 나주목사, 함경도관찰사, 공조·호조·예조의 참판, 담양부사, 상호군 동지춘추관사,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우참찬, 경기도관찰사,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부모가 병환을 얻으면 지방관으로 나와 부모봉양의 본보기가 됐으며, 가뭄과 흉년 대책을 세우고 전염병을 예방하는 의약품을 확보하는 등 30년 공직생활 동안 백성의 고통을 보살피는 목민관으로 알려졌다.

◇두번 청백리 박수량의 절개
박수량은 부엌 굴뚝에서 연기나지 않는 날이 많았고 천정에 비가 새는 낡은 집에서 살았다. 그는 1541년, 1551년 두번 청백리에 녹선됐다. 64세로 세상을 떠나자 식솔들은 가난해 상여를 따라 고향으로 내려갈 수 없었기에 명종은 특별히 장례 부의하고 서해바다의 돌을 옮겨 글을 새기지 않은 묘비를 세우도록 했다. 장성 황룡면 금호리에 있는 이 묘비가 ‘백비(白碑)’(전라남도 기념물 제198호)다.
조선왕조실록의 박수량 졸기에는 “수량(守良)은 호남(湖南) 사람이다. 초야에서 나와 좋은 벼슬을 두루 거쳤으며 어버이를 위하여 여러번 지방에 보직을 청하였다. 일처리가 매우 정밀하고 자세했으며 청백(淸白)함이 더욱 세상에 드러났다. 그의 아들이 일찍이 서울에 집을 지으려 하자 그는 꾸짖기를 ‘나는 본래 시골 태생으로 우연히 성은(聖恩)을 입어 이렇게까지 되었지만 너희들이 어찌 서울에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하였으며 그 집도 10여 간이 넘지 않도록 경계하였다. 중종께서 특가(特加)로써 포장하여 지위가 육경(六卿)에까지 이르렀지만 그가 죽었을 때 집에는 저축이 조금도 없어서 처첩들이 상여를 따라 고향으로 내려갈 수가 없었으므로 대신이 임금께 계청하여 겨우 장사를 치렀다. 비록 덕망은 없었지만 청백의 절개 한 가지는 분명히 세웠으니 세상에 모범이 될 만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청백하여 급촉(急促)한 실수가 많았다. 그의 청렴은 천성에서 나온 것이지 학문의 공(功)이 있어서가 아니었다.”라고 기록됐다.

◇청렴체험교육 명소 ‘백비’
명종은 후손들에게 99칸 집을 지어주었고 청백당이라 불렸으나 정유재란에 소실됐으며 2010년 장성군에서 청백한옥체험관으로 중건해 현재에 이른다. 박수량의 증손자인 18세 박태양(1731~?)은 아곡리 아치실에 종가를 열어 종중과 함께 묘역과 백비를 보존하며 8대를 잇고 있다. 박수량이 태어났다고 알려진 종가는 현재 종중의 동의 없이 매도돼 생가가 실전될 위기에 처했다. 최근 장성 박수량 백비에는 공무원, 대기업 등의 연수 프로그램으로 청렴체험교육을 위한 100명씩 단체방문이 계속되고 있다. 장성군은 군청 입구에 백비를 모사해 세우고 청렴문화 실천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 장성경찰서도 90년대에 민원실 건물 이름을 공모해 박수량관이라 부르며 청렴의 생활화에 힘스고 있다. 종가와 종중은 이와같은 지역사회와 국가 공직자에게 정신적 영향을 끼치는 박수량 선조의 생가가 실전될 위기에 처한 상황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박수량 백비
태양공종가 종택
장성군청 입구 백비
장성경찰서 박수량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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