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영산강 명촌에 세거한 가문
국방책·명문 남긴 인물 배출
애향·호국 정신 교류 거점
누정문화 전통 계승에 앞장

공동체 상징 희경루 누정스토리 ‘재발견’

희경루방회도 모습 / 국가문화유산포털 이미지
희경루(중건 중)

영산강이 휘감아 도는 나주 회진의 영모정에는 ‘희경루방회도’(보물 제1879호, 사본)가 걸려 있다. 영모정을 지은 임복의 생전 모습이 방회도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나주임씨 대종가(나주시 향토문화유산 제33호)의 후손들은 영모정 뿐만아니라 무안 식영정(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37호), 관해정 등을 짓고 학덕과 인품으로 명사들과 교유하며 고장과 나라를 지키고 발전시킬 거점으로 삼았다. 16~17세기 나주임씨(羅州林氏) 가문의 인물들이 누정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며 실천했던 내력을 살펴 본다.

◇ 영모정 지어 충의정신 계승한 임복
나주임씨(羅州林氏)는 고려 대장군 임비의 후손으로 고려에 충절 지켜 두문동에 은거한 9세 임탁이 1393년 영산강변 ‘회진’에 입향한 이래로 630여년 동안 집성촌을 이루며 고장을 지켜온 전라도 명문가다. 희경루방회도의 세 번째 인물 임복은 16세로서 임붕(1486~1553, 호는 귀래당)의 아들이다. 임붕은 중종반정에 참여한 정국원종공신 임평(1462~1522)의 아들로서 성균관 태학생 250여명의 소두로 조광조의 억울함을 상소한 후 낙향해 금사정에서 유생 11명과 금강계를 결사했고 2년후 과거급제해 광주목사를 역임한 인물이다. 임복은 승문원정자를 역임하고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돼 유배됐다가 낙향했다. 그가 1574년 국방정책에 관해 상소한 ‘변사의10조’를 임금이 받아들였다. 그의 제안에 따라 비변사와 각도 수사들이 창이 달린 배(철갑선)의 설계와 제작방법으로 군선을 제작했고 훗날 거북선으로 개조됐다고 한다. 희경루 방회도에 등장하는 문무 지방관들과 국방정책 상소에 관한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아버지 임붕의 충의정신을 사모해 동생 임진(1526~1587)과 회진나루 옆에 ‘영모정’을 세웠다.

◇ 식영정·한풍루·관해정에 핀 누정 전통
임복의 동생인 16세 임진은 무과급제한 청백리다. 그의 아들인 17세 임제(1549~1587, 호는 백호)는 문과급제한 천재시인으로 홍문관지제교에 올랐으나 관직을 버리고 검과 피리 들고 유람하며 시와 소설 등 많은 문학작품을 남기고 젊은 나이에 절명했다. 임제는 중국 황제에 사대하는 나라 현실을 개탄하며 ‘나 죽거든 곡하지 말라勿哭死’는 유언을 남겨 자주정신을 후손에게 전했다. 임제의 동생 임환(1561~1608)이 진사시에 힙격하고 임진왜란 김천일 의병군에서 활약했고 이순신장군에게 군량을 댔으며, 정유재란 순천 왜성 전투에서 공을 세워 ‘소의장’ 군호를 받았다. 임환은 무주현감으로 있을 때 꿈에 나타난 형 임제가 시회를 열었던 현몽에 따라 ‘한풍루’(보물 제2129호)를 중수했고(1600년), 후손 23세 임중원(1726~1788)이 다시 중수해 보물을 지키게 됐다.
임복의 손자인 18세 임련(1589~1648)은 문과급제해 우승지, 남원부사 등을 역임하고 낙향해 무안 배뫼마을로 이거하고 절경지인 영산강 느러지에 ‘식영정’을 건축해 명사들과 교유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창의해 남한산성에서 임금을 호종한 공을 세웠다. 임복의 또다른 손자인 18세 임타(1593~1664, 호는 몽촌)는 인조반정에 참여한 정사원종공신으로 의금부도사를 거쳐 부호군에 올랐고 무안 일로 희산마을에 ‘관해정’을 짓고 시문으로 장유(조선문학 4대가) 등의 명사들과 교유했으며, 현종이 사헌부지평을 제수한 특명이 당도했을 때 세상을 떠났다. 나주임씨 후손들은 2009년 무안 백련지 회산마을에 관해정을 중수해 가문의 전통을 계승했다.

◇전라도 천년 기념 ‘희경루’ 중건
광주광역시는 전라도 천년 기념 상징물로 ‘희경루’ 중건을 추진해 2023년 완공을 앞두고 있다. 신숙주의 희경루기(1451)에 따르면, 1430년 지혜롭지 못한 고을사람의 행동(애첩을 간통한 목사를 구타한 사건) 때문에 무진군으로 강등돼 남녀노소 모든 지역민들이 억울한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문종이 즉위하자 이개(순성군, 양녕대군 아들), 이맹진(목은 이색의 손자), 이조판서 권맹손, 예문관제학 이선제 등이 관리들과 함께 논의해 고을의 오랜 억울함을 상소했고, 임금의 특명으로 옛이름을 회복해 ‘광주목’으로 승격됐다. 이 소식이 전해지고, 때마침 공북루를 중수한 누각이 낙성되니, 원로들이 경축하며 온 고을사람들의 기쁨을 새겨 누각의 이름을 ‘희경루(喜慶樓)’라 지었다고 한다. 광주는 백제 때 무진주도독부, 신라엔 무주, 고려조엔 광주, 해양현, 다시 광주, 화평부가 됐다가 조선조엔 5회 강등되는 부침을 겪었다. 문종조에 광주 명예회복에 앞장선 이선제(1389~1454, 호는 필문) 선생은 덕행·문장·문벌이 현저한 이 고장 인물 90인을 선정해 향적에 올리며, 광주향약 실천을 통한 광주공동체 발전의 기반을 만들었다.
공북루를 중수한 희경루는 1533년 화재로 소실됐으나 목사 신한이 중수했으며, 18세기 중수 때 관덕정으로 바뀌고, 20세기 초에 소실됐던 것을 최근 전라도 정도 천년기념 상징물로 중건하게 됐다. 1567년 그려진 기록화 ‘희경루 방회도’(보물 제1879호)를 통해 조선 제일이었던 희경루의 모습이 드러났다. 1567년 광주목사 최응룡과 문과·무과 합격 동기생인 전라도관찰사 강섬, 전 승문원정자 임복, 전라도병마우후 유극공, 낙안군수 남효용 등 총5인이 20년만에 만나 방회를 열었고, 이를 화폭에 남겼다. 방회도는 정면 5칸 측면 4칸 팔작지붕 누마루의 건축물은 물론 경관과 복식 등 당대의 생활문화 자료의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됐다. 임복의 행적이 담긴 이 방회도가 전승됨에 따라 광주광역시가 전라도 천년 기념물로 선정하고 국시비 60억원을 들여 중건하게 됐다. 전주이씨, 광산이씨를 비롯한 전라도의 여러 종중 후손들은 선인들의 숭고한 정신이 담긴 문화유산 희경루가 애향·호국의 명소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무주_한풍루 / 국가문화유산포털 이미지
영모정
무안 -식영정
영모정파노라마
식영정 앞 느러지 풍경
임제임종물곡사 시비
희경루 조감도 / 광주광역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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