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신라 신무왕 3왕자 김흥광 시조
8대 이어 평장사 배출한 ‘光金’
칠석동에 부용정 지어 향약 실시
제향의례 전승·유적 보존 힘써

인의예지 미풍양속 시작한 향약 명문가

부용정(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3호)

광주 남구 대촌 칠석동에는 15세기 초 광주향약을 시작한 부용정이 있다. 중국 남전의 여씨향약과 주자의 백록동 학규를 바탕으로 칠석동에서 시작한 김문발의 부용정 향약이 필문 이선제의 광주향약으로 이어져 중종조에는 향약을 국가적으로 공식 추진하기에 이른다. 양과동정과 더불어 향약으로 유서 깊은 부용정은 광산김씨 가문의 보배다. 이 마을에서 600년 전 김문발이 터잡아 세거하며 선량한 풍속을 지켜 향촌의 공동체 결속을 다져온 광산김씨(光山金氏) 문정공파 녹사공후 감사공 종가와 종중을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본다.

◇신라·고려·조선 삼한 명문 ‘광김’
광산김씨는 김알지를 비조로 모시고, 신라 45대 신무왕의 3왕자 김흥광을 시조로 모신다. 그는 할아버지 김균정이 왕위쟁탈전에 패하고 아버지 김우징이 장보고의 청해진으로 피신했을 때 형제들과 함께 동행했으며, 아버지가 장보고 대군의 지원으로 복수에 성공해 신무왕이 된지 4개월만에 병사하고 형 김경응이 문성왕에 올랐지만 다시 장보고와의 관계 악화로 인한 국난을 예측하고 은거했다. 무주 서일동(오랜동안 광주 관내, 현재 전남 담양 대전면)에 터잡아 광산김씨가 대를 이어 번성하게 했다. 광산김씨는 고려조에는 8대가 대대로 평장사(정2품)에 올라 가문을 중흥시켰으며, 조선조에는 김장생, 김집 부자가 나란히 문묘에 배향된 동국18현에 오르는 영예를 얻었고 정승 5명, 청백리 4명, 대제학 8명을 비롯한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한 조선6대 국반가로 알려졌다. 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는 삼한 명문의 전통을 자랑하는 가문으로 ‘광김(光金)’이라 부른다.
3세 김길은 고려 태조를 도운 개국공신으로 할아버지 김흥광이 광산부원군에 봉해지게 했다. 4세 김준(상서도성좌복야), 5세 김책(평장사), 6세 김정준(내사시랑평장사) 등 8대에 걸쳐 평장사를 배출했다. 7세 김양감(시호는 문안)은 이자연의 문하에서 공부해 문과급제하고 서북로병마부사, 호부상서를 거쳐 문하시랑평장사, 수태보 문하시중 감수국사에 올랐다. 그는 태복경으로 송나라에 갔을 때 성리철학인 정자학의 학행과 깊은 뜻을 배우고 태묘와 태학을 도표로 그려와 공자사당을 세우고 문묘를 시작함으로써 고려 성리학 교육의 문을 열었다. 조선유현연원도에는 신라의 설총, 최치원에 이어 고려에선 김양감, 최충, 안유, 정몽주로 이어지는 계보의 중요 인물로 평가됐다.

◇4형제가 문과급제로 가문 빛내
9세 김광중(?~1170)은 과거 급제하고 병마부사, 간의대부 비서감, 상서우승을 역임했다. 서북면병마부사로 있을 때 압록강 하구의 섬에 방수군 둔전을 설치해 금나라와의 국경분쟁의 화근이 됐으나 금나라 황제의 요구에도 처벌받지 않았다. 정중부의 난에 무신들에게 화를 입었고 그 아들 김체가 복수했다고 고려사열전이 전한다. 13세 김수는 담력과 지략이 걸출해 문과급제하고 감찰어사를 거쳐 영광부사로 재직 중 왕명에 의하여 제주도에서 삼별초 난군토벌 종사관으로 종군 중 순국했다. 14세 김태현(1261~1330, 시호는 문정)은 문과 급제하고 벼슬은 우승지, 밀직부사를 거쳐 첨의중찬, 수문관대제학, 상호군 판전리사사에 올랐다. 성절사로 원나라에 갔을 때 고려 충신의 기품을 지켰고, 저서로 동국문감을 남겼다. 그가 문정공파를 열었다. 김태현의 아들 4형제가 가문을 빛냈다. 15세 김광식은 문과급제해 총부의랑을 역임했고, 둘째 김광철은 문과급제해 판밀직사사로 화평군에 봉군되고, 시호는 문민이다. 셋째 김광재는 문과급제해 예문관 대제학에 올랐으며, 시호는 문간이다, 넷째 김광로는 문과급제해 벼슬은 가안부 녹사를 역임하고 녹사공파를 열었다.

◇부용정에서 광주공동체 출발
20세 김문발(1358~1418, 호는 부용정)은 고려 우왕 때 남원·보성 등지의 왜구를 격퇴한 공으로 돌산만호, 순천부사가 되고, 조선 개국 이후에는 왜선 3척을 포획해 임금으로부터 활과 은그릇을 하사받았으며, 전라도수군단무사가 돼 다시 왜구 격퇴에 공을 세웠다. 경기도 수군도절제사, 충청전라도 수군도체찰추포사를 거쳐 충청도와 전라도와 경상도의 수군도절제사를 지내고 황해도관찰사에 제수됐다. 그가 충청도 수군절제사를 칭병으로 사직하고  낙향해 광주 칠석동에 부용정을 짓고 향민과 더불어 남전향약과 백록동규를 본받아 자치법규를 만들어 풍속 교화를 실시했다. ‘광주의 향약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광주목지’에 전한다. 부용정은 이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향약 시행지로 알려지게 됐다. 후손들은 필문 이선제의 광주 향약으로 계승된 부용정 향약의 기록을 발굴·보존하는데 힘쓰며 양응정, 고경명 등 명현들의 족적이 남아있는 부용정을 통해 광주의 공동체 정신 계승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향약은 남전여씨향약의 취지를 살려 조선에 맞게 정한 마을 구성원들의 규약으로 ‘덕업상권(좋은 일은 서로 권장한다)’, ‘과실상규(잘못은 서로 고쳐준다)’, ‘예속상교(서로 사귐에 있어 예의를 지킨다)’, ‘환난상휼(환난을 당하면 서로 구제한다)’ 네가지를 내용으로 한다. 주자증손여씨향약에는 이를 지키는 방안까지 마련해 두었다. ‘마을 규약이 네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덕과 업으로 서로 권면함이요, 둘째는 과실을 서로 타이름이요, 셋째는 예다운 풍속으로 서로 사귐이요, 넷째는 환란에 서로 규휼함이니라. 마을 사람들이 연세가 높고 덕행이 있는 한사람을 추천하여 도약정(회장 또는 유사)을 삼고 학행이 있는 두사람을 부약정을 삼으며 회원 중에 매월 한사람씩 돌아가며 직월(총무)을 맡는다. 단 도약정과 부약정은 직월이 될 수 없다. 장부 세권을 두어 향약에 들어오기를 원하는 사람을 한 장부에 쓰고 덕과 업이 가히 볼만한 자를 장부에 쓰고 과실이 있어 가히 타일러야 할 사람을 한 장부에 쓰되 직월이 그 일을 관장하다가 한달이 끝나면 약정에게 보고하고 그 다음달 직월에게 인수한다'고 기록됐다.

가문이 보존한 문서 향례합편(건,곤), 광산지, 광산김씨세장 등에서 향약에 관해 기록들이 전해진다. 김태현, 김문발로부터 박상, 박순, 박광옥, 기대승, 고경명, 정철, 송제민, 고종후, 고인후, 김덕령 등 광주 인물들이 기록됐다. 향약이 중종조에 널리 국가적으로 보급된 것은 성리학적 이상국가를 꿈꾸던 사림세력의 개혁정책과 연관이 깊다고 한다. 광산김씨 감사공 종중의 후손들은 리·촌·동 마을향약에서 태동해 현·목·부 고을의 향약으로 공동체 풍속을 만들고자 했던 선조들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김문발 유적 보존에 힘쓰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칠석동 은행나무(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0호)
부용정 전경
부용정 현판
부용정 판액(제봉 고경명의 시)
부용정 판액(송천 양응정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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