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신라에 절의 지켜 은둔 300년
청백한 가풍 이은 명신들 배출
삼전도 굴욕· 백성에 면목없어
벼슬 놓고 은거·‘직의直義’계승

대대로 절개·의리 본받은 청족(淸族)

황관재

국토 서남쪽 끝단 전남 무안 해제 장동마을에는 사철 푸른 동백나무와 함께 380여년 마을에 세거한 가문이 있다. 병자호란 때 삼전도의 치욕으로 백성을 노예로 끌려가게 만든 나라는 ‘백성에 대한 의(義)’를 저버렸으니 벼슬할 수 없다고 남쪽으로 내려와 은둔한 입향조가 종택 배후에 둘러 심은 나무가 동백이다. 종택의 병풍과도 같은 푸르게 반짝이는 5m 높이의 동백이 후손들에게 가문의 절의정신 계승을 독려하고 있는듯 하다. 진실과 겸손을 실천하며 절개와 의리를 숭상해 온 무안 기계유씨(杞溪兪氏) 충목공후 황관공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 본다.

◇신라 아찬 유삼재 시조
기계유씨는 신라조 아찬을 지낸 유삼재를 시조로 모신다. 5세 유의신이 왕건의 고려에 불복해 기계현(경북 포항 영일군 기계면) 호장으로 강속당했고 이로 인해 후손들은 기계를 관향으로 세대를 잇고 있다. 14세 유여해는 고려조 고종 때 과거 급제해 무신정권 권력자 최항을 비판하는 시를 썼다는 이유로 섬에 유배당한 일로 고려사에 기록됐다. 15세 유득선은 상승국 직장을 지내고 좌복야에 추증됐고, 그의 아들 유선은 판도판서 겸 한양부윤을 역임했으며 손자 유승계도 봉익대부 판도판서에 올라 3대가 가문을 빛냈다. 17세 유승계의 아들인 4형제가 명성을 떨쳤다.
셋째 유성복의 증손자인 21세 유기창(1437~1514, 이칭 서호산인)은 성삼문의 이종사촌으로 성종조에 무과 급제해 9개 군 수령을 역임할 때 청렴결백한 수령으로 알려졌다. 만포진첨절제사를 거쳐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연산군 폭정시기 거제도에 유배됐고, 중종반정 후 공조참의에 제수됐으나 낙향해 연산조 4절신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22세 유여림(1476~1538, 호는 정당)은 문과 급제해 예문관 검열, 성균관 직강을 거쳐 단양, 한산 군수를 지냈다. 홍문관직제학, 전라도관찰사, 도승지, 사헌부대사헌, 홍문관부제학을 거쳐 형조판서에 올랐다. 정당유고를 남겼고 시호는 경안으로 비인 청절사에서 추모한다. 유관 등 아들 3형제가 사마시에 입격한 생원·진사가 됐다.

◇전란 수습에 살신한 충목공
24세 유홍(1524~1594, 호는 송당, 시호는 충목)은 생원 유관의 아들로 문과급제해 승문원 정자, 지평,장령, 집의를 역임하고, 춘천부사로서 선정을 베풀었다. 함경도병마절도사 겸 회령부사, 개성부유수, 충청·전라·경상·함경·평안도의 관찰사, 한성판윤, 이조판서, 우의정에 올랐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 종계변무의 공을 세웠고 평난공신, 기성부원군에 군봉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고, 광해군과 함께 동북방면으로 가 도체찰사를 겸직하며 각도의 의병을 격려하며 방어태세를 정비했다.한양에 귀경해서는 불탄 도성을 정비하고 전란 이재민 구호에 힘썼다. 좌의정으로서 해주에 있는 왕비를 호종하던 중 객사했다. 그는 의리를 위해 기개를 굽히지 않는 곧은 성품으로 시문에 뛰어나 송당집을 남겼으며 충목공파를 열었다.
25세 유대일(1572~1640, 호는 용은거사)은 음직으로 벼슬에 나가 안기도찰방, 예산현감, 면천군수, 삼척부사를 역임하고 동지중추부사, 동지돈녕부사에 올랐다. 26세 유백증(1587~1646, 호는 취헌, 시호는 충경)광해조에 문과급제해 병조좌랑이 됐으나 인목대비폐모론에 반대해 낙향했다가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 기평군에 책봉됐다. 사간으로서 상소하다 좌천되기도 했으며 정묘호란에는 후금과의 화의가 잘못됐음을 상소했다. 이조참의, 충청도관찰사, 대사간, 경상도관찰사, 이조참판을 역임하고 대사헌에 올랐다. 그는 직언하다 수차례 좌천됐으나 충직함이 인정돼 매번 복직됐다. 관직생활에 작성한 상소문과 왕의 답글을 모은 서책 취헌소차를 남겼고 충주 충경사에서 추모한다.

◇‘나라도 백성에게 義를 지켜야’
27세 유제(1616~1691, 호는 황관)는 병자호란 때 이조좌랑을 역임하며 백성을 수탈하고 노예로 끌고 가는 오랑캐와의 화의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삼전도에서 굴욕 맹약을 하는 것을 보고, 나라는 백성에 대한 의를 저버렸다며 ‘어찌 나라의 록을 먹을 수 있겠는가’라며 남쪽으로 내려와 무안 장동마을에 입향했다. 집 뒷뜰에 동백나무(수령 380년 보호수)를 심고 학문에 전념했다고 한다. 37세 유동준(1905~1943)이 7형제를 두고 사망하자 젊은 부인 광산김씨는 자식들을 돌보면서도 질병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시어머니를 3년간 간병했고 위독한 시아버지를 단지로써 간호했던 효부로서 가문과 지역사회에서 효열비를 세워 기리고 있다. 종가의 후손들은 ‘직의(直義 올바른 의리)’라는 가문의 가르침을 지키며 10대를 잇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수령 380년 5m 크기 동백나무로 둘러쌓인 황관공종가 종택
수령 380년 5m 크기 동백나무로 둘러쌓인 황관공종가 종택
유동준의 부인 광산김씨 효열비
동백나무 보호수
황관재 현판
황관재 외삼문
기계유씨 세장비
장동마을 표지석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