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 전남 종가 재발견
9백년 역사의 탐라국 왕족 후예
나라 지키려는 학문 실천 가통
의로운 행적 역사에 길이 남아
명사들의 소통 명소 송석정 보존

솔 향기 피어나는 정자…뿌리 깊은 선비 가문

송석정(화순 향토문화유산 제15호)

전남 화순 이양의 지석강변에는 강정마을이 있다. 깎아지른 산세의 절경 사이를 도도히 흐르는 지석강변 암석 위에 소나무 향기를 머금은 5백년 정자가 유명해 마을 이름까지 강정이다. 이곳에 수많은 인물들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다는 결의를 ‘암석위의 소나무 정자’ 송석정에서 노래했다고 한다. 남쪽으로 기름진 들판이 내려다 보이는 이 전통 마을에서 5백년을 세거한 화순 제주양씨 학포공파 송석정 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알아본다.

◇탐라왕 양을나·유격장군 양보숭 후예
제주양씨는 제주도에 탁라(탐라국)을 세운 양을나를 시조로 모신다. 그의 후손인 양탕(良宕)이 559년(진흥왕 20년) 신라에 사신으로 예방하여 성주왕자 작호와 함께 양(梁)씨 성을 하사받았다. 후손 양순(梁洵)은 682년 신라에 들어가 과거급제하고 한림학사를 지낸 후 한라군에 봉해졌다. 고려조에 유격장군을 지낸 양보숭(1171~?)을 중조로 모시고 제주양씨 세계를 잇고 있다. 광주 양과동 충덕사에 배향됐다. 2세 양준(1206~1276)은 고종 때 검교예빈경 첨의시중 찬성사를 역임했다. 3세 양순(1253~1317)은 원종 때 진사시에 장원 합격하고 직문한서 삼사로 원나라에 가서 좌부상서로 은자광록대부를 지내고 63세에 환국해 충숙왕으로부터 이름을 하사받고 지찬성사에 올랐다.

5세 양석재(1310~?)는 충혜왕 때 문과급제하고 문하시중에 올랐다. 공민왕을 보좌해 반원정책과 왜구, 홍건적 등을 섬멸하고 국토 수복에 공을 세웠다. 그의 동생인 양동재(1314~?)도 문과급제해 개성유수 문하시랑 봉익대부 집현전대제학을 역임하고 공민왕 때 옥구 등 고을에 침입한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웠다. 6세 양한충은 종묘사령의 종부정을 지냈고, 그의 동생 양한현은 국자생원으로 학문에 정진했다. 8세 양사위는 직장을 역임했다. 10세 양이하는 성리학자로서 전남 화순 도곡 월곡리(달아실마을)에 터잡아 인재를 양성하며 학문에 정진했다.

◇학문과 절의의 두 봉우리, 쌍봉 학포당
11세 양팽손(1488~1545, 호는 학포)은 송순·나세찬과 송흠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해 문과 급제했고 현량과에 발탁돼 정언, 전랑, 수찬, 교리 등의 관직을 거쳤다. 생원시에 동반합격한 조광조와 함께 소격서 혁파, 위훈 삭제 등 중종조 개혁정치에 앞장섰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상소하다가 삭관 당하고 낙향했다. 정암 조광조가 능주로 유배와 한달만에 사약을 받자 시신을 수습해 화순 이양 쌍봉 중리에 가묘를 지어 장례했다. 쌍봉리에 학포당(전라남도 기념물 제29호)을 짓고 학문에 정진하며 기준, 박세희, 최산두 등과 교유했다. 21년 후 복직돼 용담현령으로 공직을 마감했다. 수원 삼곡서원과 화순 죽수서원(한천면 모산리)에 조광조와 나란히 배향됐다. 그는 산수도 등 명화와 학포유집을 남겼고 학포공파를 열었다.

양팽손의 아들 8형제 중 첫째인 양응기(자는 운장)는 병절교위를 역임하고 8형제 맏형으로 가문을 지키며 후학양성에 매진했다. 그의 동생 양응정(1519~1581, 호는 송천)은 선각자로서 벼슬은 공조참판, 대사성에 올랐고 명에 성절사로 다녀왔다. 명문장 과거시험 답안지 ‘남북제승대책’을 통해 여진에 대해 회유를, 왜구에 대해 사전 방어책 마련을 주장했다. 왜란과 호란을 경고하며 광주 박산마을 임류정에서 최경회, 박광전, 정운, 양산숙 등 빛나는 후학들을 양성했다.

◇의행·효행 실천하며 도학 전통 계승
13세 양산립(1529~1596)은 달아실에 학당을 운영하며 독실한 효행으로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추증됐다. 14세 양인용(1555~1615, 호는 송석정)은 무과급제해 훈련원첨정을 역임하던 중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유배하고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는 등 당쟁으로 인한 국정 혼란을 목격하며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풍광이 수려한 암석 위에 송석정(화순군 향토문화유산 제15호)을 지어 시문과 절의정신을 교유하는 명소로 만들었다. 달아실 학당에서 강론한 은봉 안방준 등 많은 지역 학자들이 송석정에 명시를 남겼다. 이 정자의 전통은 구한말에 이어져 기우만, 최익현도 중수기를 남겼다. 을사조약에 자결한 송병선, 경술국치에 자결한 그 동생 송병순 등 우국지사 형제도 늘푸른 소나무 아래서 시를 썼다.

15세 양위남(1574~1635, 호는 구봉)은 궁마에도 능한 재능으로 진사시에 합격해 성균관에서 공부했다. 이이첨의 발탁을 거절하고 낙향해 안방준과 함께 강론하며 후학양성에 전념했다. 효행으로 천거돼 중부참봉에 임명됐다. 이괄의 난에는 정열 등과 의병 창의했고, 정묘호란에도 의병군을 이끌고 정읍까지 진군했다가 귀향했다. 시묘살이 중 병을 얻어 사망한 그에게 효자정려를 내려 학포선생 부조묘(화순 향토문화유산 제7호)가 있는 달아실마을에 세웠다. 종회와 후손들은 건축 가치가 높은 송석정, 명사들의 절의정신이 기록된 50여종의 판액, 추사 김정희가 쓴 현판 등 유적을 보존하며 의로운 가문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송석정> 은봉 안방준의 시
梁子遊棲地  그대가 노닐며 깃든 곳에는
都無俗士車  속된 선비의 수레 전혀 없구려
溪流橫素鏡  시냇물은 흰 거울을 비껴 흐르고
峯秀點靑羅  봉우리는 푸른 비단처럼 점점이 빼어나네
怪石閒中友  괴석이 한가로움 속의 벗이라면
琴松儉裏奢  금송은 검소함 속의 사치로세
吾將分一半  내 이곳의 절반을 나눠 가지리니
何處不宜苽  어딘들 숨어 살기에 마땅치 않으랴

송석정과 소나무
송석정 현판(추사 김정희 글씨)
종택 안채
송석정 판액(도학자 의병장 안방준의 시)
우국지사 송병선의 시
우국지사 송병순의 시
강정마을 표지석
송석정 판액들
강정마을 팽나무

당신을 위한 추천 기사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