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충신 송계 시조·송평 중시조
기묘명현 후학 터전 물염정 지어
유희춘·권필 등 사위들 명문장
운암서원 보존 등 정신계승 힘써

무등산에 은거한 임란 전략가 가문

호남의 명산 무등산 자락에는 충효와 애민의 정신으로 이름난 해광 송제민 의병장을 추모하는 운암서원이 있다. 숙종 때 사액돼 운암산 인근(동운동 황계마을)에 건립됐고 고종조에 훼철된 후 유허비만 남았던 것을 이곳에 옮겨 중건한 서원이다. 이 서원에서 해광 송제민 선생과 아들 화암 송타, 사위 석주 권필의 의로운 정신을 기리며 광주 남구 대촌의 대지마을에 세거해 온 홍주송씨 청심헌공파 해광문중/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 본다.

◇왕가와 겹사돈 명문가
홍주송씨는 고려 문하시중 송계를 시조로 모신다. 그는 조선이 개국하자 충청도 홍주(홍성)에 은거해 홍주를 본관으로 가문을 열었다. 그의 아들 송문중(초명 송문귀)은 문과급제(1369년)하고 권근 등과 함께 명나라 과거에 응시 자격시험인 응거시에 합격해(1373) 명나라로 가던 중 조난을 당해 돌아왔고 상호군, 나주목사를 거쳐 국자대사성에 오르고 포로 송환 사절단(보빙사)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조선 건국 후 판교서감사로서 태조를 보좌하는 공을 세웠다. 좌부승지를 거쳐 풍해도안찰사로 왜구를 격퇴했다. 그의 동생 송거중도 문과 급제해 나주지군을 역임했다. 4세 송평은 조지서별제와 세자익위사 익위를 지내고 순창을 거쳐 담양 대덕에 입향한 홍주송씨 중시조다. 그는 둘째딸을 양녕대군 손자 이사성과 혼인시키고, 아들 송기손을 효령대군 손녀와 혼인시켜 왕가와 겹사돈을 맺음으로써 가문을 명문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호남사림 명사들과 교유
5세 송기손은 왕가의 사위로서 사헌부감찰, 구례·남평의 현감, 전중시어사를 역임했다. 그의 아들 4형제가 가문을 빛내고 이요당공파, 우유당공파, 청심헌공파, 훈도공파로 분파했다. 6세 송준(1477~1549, 호는 이요당)은 생원시에 합격하고 사헌부감찰을 거쳐 단성현감에 부임한지 3개월만에 갑자사화의 영향으로 벼슬을 내려놓고 귀거래사를 읊으며 낙향해 이요당파를 열었다. 그의 동생 송구(1483~1550, 호는 청심헌)는 화순·임피·동복현감을 역임하며 청심헌파를 열었다. 그가 동복현감으로 있을 때 화순적벽에 물염정을 짓고 동복으로 유배 온 최산두(1483~1536, 호는 신재)와 더불어 시회로 교유했다. 신재에게 공부했던 유희춘은 송덕봉의 남편으로 그에게는 조카사위가 된다. 신재의 또다른 제자 김인후는 그의 아들 송정황의 스승이 된다.

◇의병군 활약한 송제민 부자
7세 송정황(1532~1577)은 학덕과 인품으로 알려졌고, 김인후의 문인으로 문과 급제하고 홍문관정자, 전라도사를 거쳐 승문원 교서로 임명됐으나 윤원형의 득세를 간파하고 벼슬하지 않았다. 기대승을 찾아 학문에 정진했고 고봉의 ‘주자문록’ 발문을 직접 썼으며 ‘정자송공유고’에 시와 부를 남겼다. 8세 송제민(1549~1602)은 토정 이지함의 문하에서 학문하며 경학·역학은 물론 천문·지리·병법·한의학 등을 두루 통달했다. 조헌과 교유했고 석주 권필을 사위로 맞이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산룡·양산숙과 의병을 일으켜 김천일 의병장 막하에서 전라의병군 종사관으로 북상, 수원부에서 전국 전투의 전략을 세우며 활약했다. 조헌, 고경명의 패전 소식을 듣고 의병 병력 모집과 재규합을 위해 남하했다. 김천일 의병군마저 진주에서 패하자 귀향해 상중인 김덕령 의병장에게 제주 준마를 구해주며 창의를 권유해 함께 거병했다. 강화 소식을 듣고 ‘와신기’를 지었고, 척왜방책을 담아 ‘만언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무등산에 은거했다. 해광집을 남겼고 광주 운암사에서 추모한다.

9세 송타(1567~1597, 호는 화암)는 고경명 문하에서 수학하고 정유재란에 참전해 아버지의 충의정신을 이었다. 해상전투에 왜적에게 붙잡혔고 왜검을 탈취해 배안의 적을 죽였으나 왜선들에 포위되자 투신해 순절했다고 수은 강항이 알려 국조인물지에 전한다. 그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해 그의 옷만 바위 위에서 태워 장사지냈고 광주 운암서원에 배향됐다.그가 스승이 있는 광주 남구 대촌 대지마을에 입향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아들 송수는 가학을 이어 생원시에 합격했다. 대지마을과 황계마을, 거진마을 등 광주일원에서 12세를 이은 후손들은 해광문중으로 결속해 정자송공유고, 해광집과 해광집목판(광주광역시유형문화재 제31호) 등 기록유산과 운암서원을 보존하며 선조의 정신계승에 힘쓰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운암서원홍살문
운암서원표지석
운암사
운암서원 영모재
운암서원유허비
운암서원현판
운암사현판
장판각
운암서원외삼문
광주_운암서원_해광집목판(광주광역시유형문화재 제31호) /국가문화유산포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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