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고려엔 불출사한 신라왕족 후예
도첨의사사 김환 중시조로 모셔
김온·하소부인, 가문 일으켜
조선 초 여류학자 ‘하소결’ 관심

도의(道義)와 절개를 문장에 남긴 호남성리학 명문가

하소부인 민씨가 쓴 ‘하소결’ 필사사본 / 사진제공 김종채 중평파종원

전남 장성 북하면에는 울산김씨 집성촌 중평마을이 있다. 마을 앞 300년 된 느티나무가 그 무성한 잎처럼 번성한 김씨 가문의 역사를 지켜봤을 법 하다. 문불여장성이라는 장성의 별칭이 있기까지 수많은 인걸을 배출하며 가문의 학문 전통을 이어온 장성 울산김씨 문정공후 중평파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 본다.
 

종가 보존 고문적

◇신라 왕자 김덕지 시조
울산김씨는 신라 56대 경순왕과 죽방부인 사이의 둘째 왕자인 학성부원군 김덕지를 시조로 모신다. 그가 학성(울산)을 식읍으로 받음으로써 울산을 본관으로 하는 울산김씨  천년의 역사가 시작됐다. 그는 아버지 경순왕이 천년 사직을 고려 태조 왕건에게 양위하려 하자 반대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강산에 들어갔고 화엄종에 귀의해 승명 범공으로 해인사 등에서 정진하며 망국의 한을 달랬다.

시조의 유지를 지켜 벼슬하지 않다가 처음으로 고려 왕조에 출사한 14세 김환은 충숙왕 때 삼중대광 광록대부 영도첨의사사에 올랐다. 시호는 문숙이고 종묘에 배향된 공신이다. 그가 학성군에 봉해지고 식읍을 받았다. 울산김씨는 그를 중시조로 세계를 잇고 있다.

종가 사랑채
종가 대문 표지판

17세 김온(1348~1413, 호는 학천)은 문과 급제해 종부시주부, 밀양부사, 양주목사를 지냈다.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도운 공으로 회군개국원종공신에 올랐다. 2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워 좌명원종공신으로 여산군에 봉해지고 국조방목에 흥려군으로 기록됐다. 충녕대군 세자 책봉으로 말미암은 태종의 왕권강화 외척 제거에 화를 입었다. 장성 북이의 부조묘와 진원의 학림서원에 배향됐다.

김온의 부인 여흥민씨(1350~1421, 하소부인)는 한성판윤 민량의 딸이고 태종비 원경왕후의 사촌언니다. 여성이지만 유학에 통달해 경전과 풍수지리에 일가견이 있다고 알려졌다. 그녀가 멸문지화를 피해 아들 삼형제를 이끌고 장성 맥동으로 피난해 정착함으로써 장성에서 중흥한 울산김씨의 입향조모로 추앙받고 있다. 그녀 자신이 묻힐 자리까지 정해주고 ‘말 탄 자손이 가득하리라’고 예언했던 대로 하서 김인후를 비롯한 무수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하소부인인 그녀가 쓴 풍수지리서 ‘하소결’은 조선 전기 여성의 연구 저술로서의 특별함이 주목받고 있다.

 

하소부인 민씨의 말씀을 새긴 비석 / 사진제공 김종채 중평파 종원

◇하소부인 예언대로 50여 지파 번성

하소부인 민씨의 아들 3형제 김달근, 김달원, 김달지는 세종대왕 내외족 6촌계원으로 각각 장파, 중파, 계파의 파조가 된다. 김달근의 장파에서는 성균관사예 김율, 단종 절신 손암 김신덕,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김성길, 김대명, 김천록 등을 배출하고 종파, 백암공파, 손암공파 등 13개 지파로 번성했다. 김달지의 계파에서는 단종 절신 김처리, 장례원판결사 김걸, 광주목사 김응두, 평안감사 김백균, 오산 남문창의 의병장 김경수, 임란 공신 김신남, 김극후, 김극순(4인이 함께 진주성전투 순절), 홍문관교리 금초 김진호 등을 배출하고 서수헌공파, 오천공파 등 13개 지파로 성장했다.

종가 안채

김달원의 중파는 임란공신 김응문, 문묘배향 동국18명현 김인후, 광국공신 김남중과 부인 의인 행주기씨, 성리학자 맥촌 김형지, 화산처사 김명하, 송시열 문인 각재 김기하, 자연당 김시서, 향약 저술한 환암 김희서, 사헌부장령 맥호선생 김수조, 승정원승지 김우휴, 기정진 문하생 신호 김녹휴, 한말의병장 김익중 등 인걸들을 배출했다. 문정공파, 주부공파, 중평파 등 18개 지파가 있다.

김인후부조묘 현판

22세 김인후(1510~1560, 호는 하서, 시호는 문정)는 호남 유일의 문묘배향 유학자로서 문과 급제해 승문원정자, 홍문관 박사, 세자시강원 설서, 홍문관 부수찬, 옥과현감, 승문원 제술관을 역임했다. 그가 인간적 경애와 의기투합을 주고받았던 인종이 승하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을 내려놓고 낙향해 성리학 연구와 후학양성에 매진했다. 그는 기묘사림의 신원 회복에 힘썼고, ‘주역관상편’, ‘서명사천도’를 저술하고, 이황, 기대승 등과 태극도설을 논변했다. 천문, 지리, 의약, 산수, 율력에도 통달했고 1,558수의 시를 10권의 시문집에 남겼다. 문묘와 장성필암서원, 남원 노봉서원, 옥과 영귀서원에 제향됐다.

 

김인후부조묘 외삼문

◇김인후 학문전통 잇는 후손들

김인후의 손자인 24세 김남중(1570~1636, 호는 취옹당)은 선교랑으로 1591년 종계변무(이성계 종계의 기록 수정을 명나라에 주창함)에 공을 세워 광국원종공신에 추록됐고 임진 정유년 왜란에 종군했다. 그의 부인 행주기씨는 기대승의 딸로서 정유재란에 침략한 왜병이 가는 길 막고 팔을 잡으려 하자 팔을 자르고 황룡강에 뛰어들어 순절했다. 잘린 팔을 수습한 남편이 ‘일비장’(一臂葬)으로 장사 지냈다. 나라에서는 충절을 기리는 정려를 하사했다.

기씨부인-열녀비각정려 / 사진제공 김종채 중평파 종원
김인후부조묘

27세 김익서(1644~1688)는 무과 급제해 비변사 비변랑, 어모장군 용양위 부사관, 선전관을 지냈다. 그의 아들인 28세 김효현(1671~1720)은 통덕랑을 지내고 중평파를 열었다. 그의 두 아들 김상조, 김찬조, 손자 김방욱 역시 통덕랑을 지냈다. 사헌부지평 김간휴(31세), 성리학자 김철환, 돈영부도정 김칠환(32세)이 학덕으로 가문을 빛냈다. 종가는 화개산 풍수명당에 자리한 유적과 하소부인 저서 ‘하소결’을 비롯한 문적에 흐르는 선조 정신 계승에 힘쓰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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