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진주정씨(晉州鄭氏) 정예계 장령공파 오봉공후 백암종가
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정예계통 진주정씨 청백 가통 빛나
단종 충신 계유정난에 역적 몰려
220년만에 복권 충장공 시호받아
오봉 아래 대대로 학덕·충절 계승

[118] ‘충효도 못다하고 가는 길 서러워라’… 학자 의병장 후손 가문

오봉사 전경

전남 보성 득량의 오봉산 자락에는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형국의 갈마음수명당에서 이름한 마천리(馬川里)가 있다. 전라좌의병군의 종사관으로 활약하다 전장에서 숨진 오봉 정사제 선생의 후손이 세거하는 마을이다. 마을에서 나고 자란 인물들을 굽어보며 4백30여년 마을을 지킨 학자수 회화나무는 샘터 옆에 기울어져 있는데, 150년된 느티나무가 학자수인냥 보호수로 존대받고 있다. 의병장 정사제 선생의 임절시에 담긴 절의정신과 나라지킨 혁혁한 전공은 외면하면서 전쟁터에서 주인집까지 사망소식을 전한 후 숨진 말과 말무덤 스토리는 기억되고 있다. 보성 진주정씨(晉州鄭氏) 정예계 장령공파 백암종가를 찾아 가문의 애환과 충절 내력을 살펴본다.

◇진주정씨 8시조 정예계 후손
진주정씨 정예계 장령공파는 고려 문하시중평장사 정예를 시조로 모신다. 진주(진양)정씨는 신라 건국의 주축인 6촌 중 진지촌의 지백호를 원시조로 하지만 이후 계대가 밝혀지지 않아 ‘진주8정’이라는 여덟계통이 동성동본을 이룬다. 그중 주류 4계통이 각각 정예, 정자우, 정장, 정헌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정예(호는 백곡)는 고려조에 문과 급제해 여러 고을 수령을 역임하며 청백한 관리로 알려졌고 벽상삼한공신에 올라 영절공 시호를 받았으며 진주 세덕사에서 추모한다. 정시양(호는 송암, 시호는 문익공))은 고려조에 문과 급제하고 벼슬은 홍문관과 예문관 양관 대제학을 역임하고 주국태사에 올랐으며 진양(진주)으로 낙향해 송암정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정예계는 가문을 일으킨 그를 중조로 모신다.
가문을 중흥시킨 7세 정수(호는 송죽당)는 충열왕 때 문과급제해 벼슬은 보문각 대제학을 역임하고 좌리공신 진양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영공이다. 8세 정수규(호는 학사당)는 정당학사, 광정대부도첨의와 상호군평장사를 지냈고 세번이나 내사령을 역임했다. 그는 왕궁 내 호화로운 전각 건설에 대해 조정에서 간쟁을 통해 ‘경치를 즐기는 곳이 아니라 나라 정치를 하는 곳’이라며 승관당이라는 당호를 반대했고, 이 간언을 받아들인 충열왕이 즉시 전각을 헐도록 명하고 그를 사부로 예우했다고 한다. 정을보(호는 면재)는 충숙왕 때 국자시에 장원급제하고 목은 이색과 함께 발탁돼 정당문학참찬, 공부시랑, 이부상서, 삼중대광도첨의와 찬성사, 지춘추관사, 상호군을 역임했다. 조일신의 난에 옥고를 치루고 광양감무에 좌천됐다. 찬리공신 청천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량공이다.

◇역적으로 몰린 단종 충신 후손의 비애
12세 정신중(1327~1380)은 문과급제하고 의정부 찬성사를 지냈다. 그의 아들 정이오(1347~1434, 호는 교은, 시호는 문정공)는 이색과 정몽주에게 학문을 배운 문장가로 문과급제해 예문관검열, 삼사도사를 역임하고 은거했다가 조선 개국 후에는 조준, 하륜과 함께 ‘사서절요’를 찬하고 ‘태조실록’편찬에 참가했다. 벼슬은 예문관대제학 겸 지공거, 의정부찬성에 올랐고 ‘교은집’과 ‘화약고기’를 남겼다. 14세 정분( ? ~1454, 호는 애일당, 시호는 충장공)은 건축전문가이자 문종의 고명충신이다. 그는 문과급제해 세종조에 공조참판, 호조판서, 우찬성을 거쳐 문종조엔 좌찬성을 역임하며, 숭례문을 개축하고, 해미읍성을 축조하는 등 토목건축에 탁월했고, 우의정으로 김종서, 황보인과 함께 단종을 지키다가 계유정란이 일어나자 낙안군에 유배됐으며 관노로 1년을 살다가 거듭된 회유를 거절해 사사 당했다. 그로부터 220년후인 숙종조에 환원되고, 영조가 충장공 시호를 내렸다. 정신중, 정이오, 정분 3대 무덤이 진주 상대동에 보존돼 경상남도 기념물 제159호로 지정됐다.

14세 정분의 동생 정순(?~1460, 호는 천산옹)은 경전을 연구하고 의를 실천한 문관으로 세종조에 문과급제하고 홍문관정자, 성균관직강, 사간원헌납을 거쳐, 사헌부장령을 역임하고, 단양군수, 이조좌랑 이후 사헌부지평으로 있을 때 계유정란을 맞아 벼슬을 내려놓고 낙향했다. 사사의 화를 입은 정분의 시신을 수습하고, 단종 승하 소식을 듣고 진주 집현산에 단을 마련해 통곡하며 3년 복상례를 실천한 후, 세상사를 사절하고 은둔했다. 그가 장령공파를 열었다. 성균관 생원인 19세 정숙인(1491~?, 호는 석포)이 보성에 입향함으로 후손은 보성 득량 마천리에 세거했다.

◇충절 가통이어 전라좌의병 맹활약
정숙인의 손자인 21세 정사제(1556~1594, 호는 오봉)는 백부인 현학처사 정근에게 배우고 퇴계 이황에게 수학한 학자로서, 문과급제해 승문원정자로 있을 때 모친상 시묘살이 중 임진왜란을 맞이했다. 그는 죽전 박광전, 삼도 임계영에게 의병창의를 건의하고 보성 일원 1천 의병을 모아 임계영 의병군(전라좌의병)의 종사관으로 활약했다. 박근효, 안방준과 함께 군율을 정하고 격문을 보내 의군 병사와 군량을 모집하여 순천만호 장윤과 합세해 남원으로 진군했다. 최경회군과 함께 무주,금산에서 싸웠고,추풍령을 넘어 영남의병 정인홍 의병군을 지원하고 소상진, 최억남과 합세한 전투에서 승전해 4백여명의 포로를 구출하며 성주·개령을 수복했다. 남원 광한루에서 적의 기습을 받아 진중에서 순절했다. 임종 직전 ‘인간세상 충효 소원 이루지 못하고 구천으로 돌아가려니 한이 더욱 그지없네 未了人間 忠孝願 九原歸路 恨悠悠’라는 임절시를 남겼다. 그를 따르던 충복 맥금이 그의 애마를 타고 돌아와 절명소식을 전했고 가족들은 제단을 세워 장례하고 옆에 말무덤(의마총)을 조성해 오랜 전투에 지쳐 죽은 애마를 예우했다. 그의 학덕과 공훈은 충남 금곡사, 보성 오봉사, 정충사에서 추모한다. 후손 28세 정동추(호는 백암)는 정사제의 생가터에 백암종가를 열었다. 종가 후손들은 8세대를 이어 선조가 남긴 충절정신과 문장을 계승·보존하는데 힘쓰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오봉사현판
원후재
원후재 현판
정사제 생가터라고 알려진 백암종가 종택
오봉문집
마천리 마을샘 옆 회화나무(400여년)
보호수 느티나무(오봉 정사제 선생과 인연이 있는‘학자수’라고 알려진 나무는 마을 샘가에 있는 회화나무고 150년 된 느티나무와는 무관한데 보호수 지정 당시 오인이 있었다고 함)
입향조 정숙인유허비
마천리 마동마을표지석
원후재 근마문(이 지역이 풍수지리에서 갈마음수형 명당이라 하여 적실근 말마 근마라 이름붙임)
보호해야 할 학자수 회화나무
보호해야 할 학자수 회화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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