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광주광산 전의이씨(全義李氏) 대사성공후 형조정랑공파 석탄공 종가

고려통일·대몽항쟁 영웅 이도·이천 후손
직언상소 명신·선정 배푼 목민관 배출
‘의義가 아니면 행하지 않는다’ 정신 계승

경장각 전경

광주 광산 장덕동에는 아파트 숲 사이로 유애서원이 있다. 이 서원 경장각에 거문고를 비롯한 유물들을 보존한 가문은 전의이씨 석탄공 종가와 종중이다. 전장에 나가면 견훤군, 몽고군에 대항해 승전한 무장 선조들의 기질이 발휘되고, 나랏일에 임하면 선비다운 절개로 서슴없는 직언 상소를 행하는 인물들이 즐비한 가문이다. 거문고를 남기며 ‘인의예지신’에 ‘락樂’을 더한 ‘인간의 도리 6행’을 제시한 의병장의 행적을 따라, 대대로 그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힘쓰고 있는 광주 광산의 전의이씨 석탄공 종가의 내력을 살펴본다.

◇고려 개국공신 태사 이도 시조
전의이씨는 고려 태사 이도를 시조로 모신다. 이도는 공주 호족이었는데 왕건 군대가 급류가 흐르는 금강을 건너 후백제군 기습에 성공하도록 도운 공을 세워 응양대장군, 개국익찬공신에 오르고 ‘도’라는 이름을 하사받았으며 삼한삼중대광태사 전산후에 봉해졌다. 지명을 정해 영지로 하사한 전의(全義, 세종시 전의면 일대)를 본관으로 후손들이 세대를 잇고 있다. 7세인 이천은 고려조 대몽항쟁의 영웅으로 알려졌고 해군이 1992년 건조한 잠수함 ‘이천함’ 명칭의 주인공이다. 대몽 항쟁기인 1256년 고종의 명을 받은 이천은 특수잠수선을 만들고 200명 수병으로 아산만 해역의 몽고군을 기습 공격해 포로된 백성을 구출하며 온양을 평정했다. 이는 고려군이 호남 서해안에서 몽고군을 격퇴시키는 디딤돌이 됐고, 그는 응양대장군, 지예부사에 올랐다.
이천의 아들 3형제가 분파했다. 8세 이자원은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대사성공파를 열었다.그의 동생 이혼(1252~1312, 호는 몽암, 시호는 문장)은 문과 급제로 가문을 빛냈고 조카 이언충을 보살펴 정당문학에 오르도록 성장시켰다. 이로 인해 성균관대사성을 증직받은 이자원(대사성공파), 둘째 이혼(문장공파), 셋째 이자화(전서공파)가 각 분파의 파조가 된다. 이혼은 과거급제해 벼슬은 광주참군, 국학학정, 동지밀직사사를 거쳐 도당의 폐단을 상소하다 파직당한 후 재기용돼 지밀직사사세자원빈, 도첨의찬성사에 오르고, 충선왕의 중방폐지 등 관제개혁을 도와 대사백 벽상삼한공신에 녹훈됐다. 반대 세력의 원망으로 좌천됐다가 돌아와 첨의정승에서 물러났다. 거문고와 바둑을 즐겨 ‘무고’를 악부에 남겼다.

◇세종 어필 ‘충효가훈’ 만백성 본보기
9세 이언충(1273~1338, 호는 운재, 시호는 문의)은 과거급제해 흥신궁녹사, 군부좌랑, 전의겸관, 서림을 겨쳐 하정사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밀직부사, 대사성, 지제고,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에 올라 가문 부흥에 기여했다.
가훈 ‘가전충효 세수인경 家傳忠孝世守仁敬’은 이정간의 효성을 높이산 세종대왕이 하사한 글이다. 11세 이정간(1360~1439, 호는 효정)은 음직으로 벼슬에 나가 사헌부집의에 올랐다. 그가 강화부사로 있을 때 호랑이를 사로잡아 태종에게 비단을 하사받았다. 그는 부모 봉양을 위해 강원도관찰사를 사직했으며, 80노령임에도 100세된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 색동옷을 입고 병아리를 가지고 놀면서 효행에 힘썼다. 그의 독실한 효성을 들은 세종은 중추원사 벼슬과 ‘궤장’을 하사했으며 친필로 8글자를 하사했고, 이는 전의이씨 가문 가훈으로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

세종 어필 가훈 ‘가전충효 세수인경’

◇의로운 행적·유물 보존 계승
13세 이직간은 형조정랑을 역임하고 형조정랑공파를 열었다. 17세 이원손(1498~1554, 호는 무하옹) 문과 급제해 홍문관정자, 헌납, 지평, 호조좌랑을 역임했다. 군기시정으로 중종실록 편수에 참여하고, 권신 윤원형을 탄핵하다 외직으로 물러나 경성부사, 평양소윤, 삭주·원주·의주·성주 등의 목사를 역임했다. 뛰어난 인품으로 더러운 것을 배척하고 청렴을 선양하는 일을 임무로 삼아 사람 추천과 탄핵에 회피하지 않은 강직한 충신이다. 그의 선정을 기리는 유애비가 평양에 세워졌고 ‘무하옹집’을 남겼다.
18세 이신의(1551~1627, 호는 석탄)는 어려서 양친을 잃고 형인 이신언에게서 자라 행촌 민순에게 수학해 학행으로 벼슬에 나갔고 예빈시봉사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에는 의병을 모아 김천일 의병군과 함께 한강과 행주산성에서 활약하고 적선현감을 역임했다.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비한 패륜에 대해 헌의상소로 반대해 함경도 회령에 유배돼서는 거문고를 벗삼아 시문을 지었다. 인조반정으로 복권돼 형조참판 경연특진관에 올랐다. 정묘호란에는 어가를 호종하다가 수원에서 사망했다. 괴산 화암서원, 광주 유애서원에서 추모한다. 그는 ‘인의예지신락’ 6행의 도리를 주장하며,‘도道가 아니면 가지 않고 의義가 아니면 행하지 않는다’는 절의 정신을 ‘석탄집’에 남겼다. 거문고와 선조 어필 병풍 등 유물(경장각 보존 후 국립광주박물관 위탁)이 경장각에 전승된다. 그의 며느리인 광산이씨는 정여립역모사건을 지켜보며 정쟁의 참혹함을 알게됐기에 인조반정 직전에 이호(호는 은와), 이소(호는 모와), 이경(호는 광와) 등 4남매와 함께 남쪽으로 피신해 나주 남평에 이거했다. 3형제는 모친인 광산이씨의 뜻에 따라 이신의의 복권 후에도 상경하지 않고 광주 장덕동에 정착했다. 나라에서 내려진 감역, 참봉, 통덕랑 벼슬에 나가지 않았고 초야에서 학덕을 쌓으며 후손들로 하여금 대대로 13대를 이어 가훈과 유산에 담긴 선조의 정신 계승에 힘쓰게 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유애사 전경
유애서원 전경
이신의 거문고(국립광주박물관에 위탁보존)
경장각 현판
이신의영정(복원 모사)
유애서원 표지석
이신의에게 인조가 하사한 선조 어필.
이신의에게 인조가 하사한 선조 어필.

당신을 위한 추천 기사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