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대들에서 물러난 동학군, 해남읍성 공격

(67) 해남의 동학농민혁명유적지
석대들에서 물러난 동학군, 해남읍성 공격
일군·관군 우슬재 진치고 있던 농민군 공격 무참히 살육
무안·해남 대접주 배상옥·백장안 등 지도자 즉결 처형당해
바다로 몰린 농민군들 진도와 제주도, 추자도 등으로 피신
 

1872년에 제작된 <지방지도>의 해남
해남은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한 구해국(狗奚國)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새금현(塞琴縣)이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에는 침명현으로 개칭됐다. 고려초에 해남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조선 초인 1409년에 왜구의 극성으로 육지에 옮겨온 진도현을 병합하여 해진군이라 불렀다. 1437년에 다시 분리돼 해남현으로 유지됐다

■ 해남지역의 동학세력

전남 해남에서는 1894년 여름에 동학농민군이 읍성을 점거해 집강소를 설치했다.

관군 기록에 따르면 6월 12일 28명, 17일 2천여 명, 23일 10여명, 20일 60여명, 7월 3일 240명, 8일 20명, 16일 200여명의 동학군이 각기 총과 창, 검을 들고 해남에 들어왔다고 나온다.

해남의 집강소는 남동리 일대에 세워졌다. 해남에 들어온 동학농민군들은 아전인 안씨의 집을 불태워 버렸다. 농민군 토벌이 시작됐을 때 안씨 집안은 농민군들을 색출하고 처형하는데 앞장섰다고 한다.

1894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해남과 무안등지의 농민군은 몇 차례 우수영을 공격했다. 우수사는 진도 등지의 수성군과 힘을 합쳐 농민군을 막아냈다. 농민군들의 공세가 거세져 11월에는 영암지역에 원군을 요청할 정도였다.

전남지역의 동학농민군은 9월 재봉기 당시 북상하지 않고 현지에 남았다. 전봉준은 손화중과 최경선, 이방언, 배상옥 등으로 하여금 나주관군을 묶어두고 서해안으로 상륙하는 일본군을 막아줄 것을 당부했다.

당시 일본의 군함과 기선은 서남해안일대에 포진해 있었다. 부산 쪽에서도 일본군과 관군이 광양과 순천, 보성을 거쳐 진격해오고 있었다. 남북접 동학농민연합군이 북상하자 조정은 9월 30일 토벌군을 조직해 두 곳으로 나눠 보냈다.

남쪽으로 내려오는 일본군은 3개 중대였다. 미나미 쇼시로(南小西郞)가 토벌군 총지휘관으로 임명됐으며 조선 관군은 그의 지휘를 받았다. 관군은 장위영병을 좌선봉진으로, 통위영병을 우선봉진으로 나눠 농민군 토벌에 나섰다.

좌선봉장은 이규태, 우선봉장은 이두황이었다. 일본군과 관군은 농민군을 전남 서해안 쪽으로 몰아 쓸어버리려는 ‘토끼몰이 식’ 작전을 세웠다. 10월 28일에는 나주목사 민종렬을 호남 초토사를 삼아 전남지역 농민군을 토벌토록 했다.

11월 초순에 벌어진 공주 우금치 전투는 농민군의 패배로 끝났다.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은 11월 27일 태인 전투를 끝으로 해산했다. 전봉준 등 상당수 지도부가 체포됐다. 이런 가운데 손화중과 최경선의 농민군은 나주성 공격에 나섰으나 큰 피해만 입고 물러났다.

전북지역에서 밀려온 일부 동학군과 북상하지 않고 전남지역에 남아있던 장흥지역 농민군은 12월 벽사역과 강진성, 병영성을 함락시킨 뒤 12월 14일과 15일 석대들에서 관군과 일본군을 맞아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석대들 전투의 결과는 농민군의 완패였다. 최신식 무기와 잘 훈련된 군사들의 전투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장흥 석대들 전투 이후 일본군의 체포를 피해 도망간 농민군들은 해남으로 몰려왔다.

■동학농민군의 해남읍성 공격과 조일연합군의 토벌

농민군은 해남읍성을 점령하기 위해 성 주위를 포위했다. 좌선봉 이규태부대는 해남읍성이 위급하다는 전갈이 오자 해남으로 급히 출발했다. 이 때 해남 현감은 이규태의 조카사위였고 전라도 우수영의 우수사 역시 이규태와 가까운 인척으로 알려졌다.

12월 18일 통위영 부대가 해남에 들어갔다. 통위영중우참령관의 첩보에는 당시 상황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12월 18일 오시(午時) 쯤에 본진이 연당리에 도착해 주숙(駐宿)했다. 그날 밤 축시(丑時) 쯤 해남현 근경에 도착하여 적진을 살펴보니 비도 수천 명이 성 밖에 둔취하고 있었다. 양 소대를 둘로 나누어 공격해 비류들을 향해 여러 차례 발포했다.

이에 아군이 일제히 사격하며 돌진하자 적도가 황망히 도망쳤다. 이중 포에 맞아 죽은 자가 8-9명이고 전유희와 남성역(南里驛) 대접주 김신영은 생포됐다”

다음날 교도병 300명이 들어와 해남읍을 탐색하면서 농민군을 색출했다. 이들은 해남 우수영과 진도까지 가옥들을 뒤지며 수색활동을 벌였다. 12월 21일에는 일삼면(一三面) 거리(巨里)의 박수행과 현일면(縣一面)의 허권과 신아무개, 진도 삼촌리(三寸里)의 김중야 등이 포살됐다.

12월 22일 우선봉 이두황부대가 해남에 도착했을 때 일본군과 교도병들은 해남을 떠나고 없었다. 우선봉진의 첩보에는 해남읍에 있는 10집 가운데 9집이 비어 있었고 황망한 모습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통위영 부대의 수색으로 해남에 숨어있던 농민군 지도자들은 대부분 체포된다. 12월 22일 붙잡힌 동학지도자들은 이도면(梨道面)의 접주 김순오와 교장 박익현, 집강 이은우, 별장 박사인, 교수 김하진 등이다.

12월 24일에는 은소면의 윤규룡 등이 무안 접주 배상옥을 붙잡아 관군에 넘겼다. 일본 보병 대위 松本正保는 그 자리에서 배상옥을 죽이고 윤규룡에게 상금을 주었다. 12월 25일에는 현일면(縣一面) 해리(海里)의 김춘두와 김도일(金道日)등이 잡혀왔다. 김춘두와 김도일은 1차 봉기 때 백산 전투에 참여한 접주들이다.

관군들은 농민군을 숨겨준 사람들도 엄중히 처벌했다. 농민군들은 숨을 곳이 없자 해남 대흥사 암자에 몸을 숨기기도 했다. 이에 선봉진 부대는 대흥사에 전령을 보내 동학군을 숨기다가 발각되면 모든 사찰이 도륙되고 어육이 되는 재앙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협박하기도 했다.

일부 농민군들은 몰래 배를 타고 섬으로 빠져나갔다. 이에 관군들은 이를 알고 배가 있는 곳에 매복을 하는 한편 주요길목에 군사를 배치했다. 12월 28일에는 녹산 산림동의 접주 김경재(金京在)와 접사 박흥녕(朴興寧), 배규인의 마부 김종신, 접사 강준호(姜準浩)등이 체포돼 처형당했다.

같은 날 가리포진에서 붙잡힌 백장안과 산림동 교장 윤종무(尹鍾武)도 포살됐다. 29일에는 해남 현산면 풍헌 주기안 등이 접사 장극서(張克瑞)와 교수 이중호(李重鎬), 도집 임재환(林재煥), 집강 최원규(崔元奎)를 잡아들여 조사하고 있음을 통위영에 보고했다.

1894년 12월 29일에 체포된 장극서와 이중호, 임재환, 최원규는 1895년 1월 5일에 일군에 넘겨져 칼에 찔려 죽었다. 12월 30일 일본군 후비보병 제 19대대 제 1중대가 우수영에 주둔하면서 농민군을 체포해 처형했다. 1중대의 일부는 진도까지 내려가 12월 27일부터 30일까지 머물며 수백 명의 농민군을 체포해 죽였다. 다행스럽게도 일부 농민군들은 일본군과 관군의 눈을 피해 배를 타고 떠나 멀리 추자도까지 숨어들어가게 된다. 진도로 간 일부 농민군은 고군면 마산리 동쪽 바닷가 골짜기인 의병골창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로 도망을 가기도 했다.

해남은 주로 녹산(鹿山 : 현 삼산면)과 현산(縣山),비곡(比谷 : 현 계곡면 일부)을 중심으로 동학이 전파됐다. 해남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했던 백장안은 1888년 강진 병영에서 실시한 향시에서 무과 병과에 급제한 인물이다.

백장안은 과거에는 급제했으나 벼슬은 하지 못했다. 이런 까닭에 그가 동학군에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백장안은 우수영을 치기위해 12월 16일에 기포했다. 그러나 관군에 밀려 도망 다니다 12월 25일 완도 불목리에서 잡힌 후 삼산천에서 포살됐다. 대흥사 앞의 구리미리 37번지가 그의 본적이다. 그의 묘는 상가리 선산에 있다.

해남과 강진, 영암, 장흥에 들어온 일본군은 동학도들을 찾아내 잔인하게 죽였다. 성을 지키다 죽은 수성군의 유족과 유생들도 동학항쟁에 참여했던 농민들을 색출해 도륙을 냈다. 가족 중에 동학농민군들이 있으면 같이 해를 당했기에 성과 이름을 바꾸고 다른 지방으로 도망간 이들도 많았다.

다행스럽게 화를 피한 동학도나 그 가족들은 족보에 죽은 가족의 사망일을 다르게 적었다. 12월 초와 중순에 죽은 이라면 동학군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주위로부터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장흥지역의 농민군들이 대거 도망을 왔고 또 동학교도들의 수가 제법 많았지만 해남은 이런 이유로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자료나 유적들이 별로 많지 않다. 이는 역설적으로 해남이 그만큼 동학세가 컸고 피해 또한 막대했음을 시사해주는 것이다.
/최혁 기자 kjchoi@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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