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軍·관군, 진도 벽파 항 상륙 동학농민군 색출

남도동학유적지-(66회) 진도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日軍·관군, 진도 벽파 항 상륙 동학농민군 색출
체포농민 모두 살해방침 따라 수백 명 잔혹하게 처형
일부 농민들 마산마을 의병골창에서 배로 제주도 피신
갑오항쟁 진압 후에도 진도주민들 일제 맞서 의병투쟁
 

벽파항

(1) 벽파진 일본군 상륙지

동학농민혁명 당시 장흥·강진·여수·해남 등지에서 진도로 피신한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일본군이 진도에 상륙한 곳이다.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 조선 경군 측 기록에 따르면 조선경군 30명과 일본군 1개 지대는 1894년 12월 26일 진도 벽파진에 상륙했다.

12월 27일에 진도 읍성으로 들어와 동학농민군들을 색출해 처형하기 시작했다. <순무선봉진등록>에 따르면 경군과 일본군이 진도읍에 도착했을 때 손행권과 김수종, 이방현, 김윤선, 주영백, 김대욱, 서기택 등이 이미 체포돼 있었다.

12월 27일 일본군과 경군은 진도 수성군과 함께 붙잡은 동학도와 농민들을 취조하고 손행권 등 7명을 처형했다. 그러나 <진도종리원연혁>에는 ‘당시 진도에서 관군에 학살당한 도인만도 무려 7~80명 이었다.’고 기록돼 있어 수성군에 의해 처형당한 이가 많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일본군과 관군은 동학농민군을 전라도 서남부 해안지역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일본군과 조선 경군은 각기 나주-목포와 강진-장흥 등을 거치며 남하했다. 좌선봉진군은 1894년 12월17일 진도와 가까운 해남 우수영에 도착했다.

또 12월 19일에는 통위영병도 해남읍에 도착했다. 이들 관군들은 장흥 석대들 전투 이후 해남과 강진, 진도, 완도 등지의 섬으로 도주한 농민군들을 색출해 처형하는데 주력했다. 이때 일본군은 후환을 남기지 않게 하기 위해 체포한 동학농민군은 모두 살해한다는 방침을 정해두고 있었다.

12월20일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 제1중대와 제3중대가 해남에 도착했다. 좌선봉진에서‘동학거괴’들이 섬으로 숨어들어 갔다고 알려오자 일본군은 인천의 사령부에 ‘동학농민군 2~3천명이 해남지방으로부터 진도와 제주도에 있다.’고 보고했다. 인천 남부병참감부 사령관 이마바시(今橋)는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장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에게 일본군 1개 지대를 진도로 파견해 농민군을 색출해 처형토록 지시했다.

조선경군 30명 및 일본군 1개 지대가 12월 26일에 진도 벽파진에 상륙했다. 이들은 12월 27일 진도 읍내에 도착해 동학농민군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했다. 일본군은 토벌작전을 마친뒤 12월 30일 우수영으로 철군했다
 

벽파항 선착장. 일본군 1개 지대와 조선경군 30명은 1894년 음력 12월 26일 진도 벽파진에 상륙했다. 이들은 다음날 진도 읍내에 도착해 동학농민군을 무자비하게 처형했다.

(2) 솔개재 농민군 처형지

진도지역 농민군이 집단으로 처형된 곳이다. 진도군 진도읍 교동리 438번지 일대.

조선 경군 30명 및 일본군 1개 지대는 12월 26일 진도 벽파진에 상륙한 뒤 12월 27일 진도 읍내로 들어왔다. 그러나 이에 앞서 상당수 농민군들이 진도수성군에 붙잡혀 이미 처형을 당했다.

진도 주민들은 예전에 어르신들이 “진도 수성군이 동학군 30여명을 죽인 뒤 남문 밖에 버렸다가 송장냄새가 진동하자 다시 이를 솔계치(샘골)에 내다 버렸다.”고 증언했다고 밝히고 있다.

또 <진도군지>에는 ‘조도면 출신인 박중진 등 50여명을 잡아다 수성군이 타살하여 읍의 서편 솔계치에 버렸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3) 의병골창 농민군 도항지

진도의 농민군이 제주도로 피신하기 위해 배를 탄 곳이다. 진도군 고군면 내산리 485 일대이다. 일본군과 경군이 진도에 들어와 농민군을 색출해 처형하자 진도로 피신해와 있던 농민군 중 일부는 마산마을 의병골창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로 피신했다.
 

진도 솔개재. 진도 읍내에 진입한 일본군은 동학농민군들을 색출해 무자비하게 처형했다. 농민군들이 당한 솔개재 전경. 일본군은 토벌작전을 마친 뒤 12월 30일 우수영으로 철군했다.

 

■진도에 나타난 50 명의 항일의병

일본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이후에도 조선민중들은 꾸준히 저항했다. 일본의 대륙진출 발판이자 첫 대상인 조선에서, 동학을 계기로 군대를 파병한 그들의 침략은 동학진압으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전국적 민중저항은 의병형태로 일어났다. 당시의 신문기사를 본다.

‘대한매일신보’ 1909. 1. 13

「이달 4일 전라남도 진도 부근에서 의병 50여명이 해지주재소(註; 진도 경찰주재소) 일본순사와 교전하였다 하고」,

‘대한매일신보’ 1909. 1. 27 ‘珍島의 大風雲’ 「지난 4일 오전 1시에 의병 50명이 진도에 있는 일본인을 야밤을 타고 습격하여 흥업회사 지배인 오미부작(五味富作)을 쏘아 죽이고 그 사무소를 반파시키고 재무서와 경찰서와 일본인 집 9호를 맹렬히 포격하여 일본인 잡화상 수인의 가재와 상품 전부를 혹은 태우고 혹은 탈취하여 노래를 부르며 철수했다.」

‘대한매일신보’ 1909. 2. 17 ‘韓士日收’

「목하 진도에는 평온한데 지난 1월4일에 의병이 읍내를 습격한 이후에는 의병의 그림자가 없고 이 섬에 현재 거주하는 일본인은 순사 2(부부), 재무주사(부부), 우편소장 외 1명과 교사 1명, 농상업자 4명인데 일인들은 조선흥업회사를 경영하여 1만원을 투자하고 전답과 염전을 매수하였는데 작년에는 그 병작미(竝作米)를 9할로 징수하였다더라」

‘대한매일신보’ 1909. 4. 29

「이달 24일 밤 전라남도 진도에서 의병 20여명이 전남경찰부장 이하 수명의 순사와 교전하였다더라」

이처럼 의병들이 진도에서 일본경찰과 교전하고 일본인을 총살하는 등의 사건에 관한 주민의 기록이 있다.(진도읍 북상리 박종준씨(1912년-1995년의 회고록 중)

「(前略)일본인 오미(註 五味)란 者가 제1착으로 우리고향 진도에 첫 이민이 되어 지산면 ㅇㅇ에 지산면민을 동원시켜 방조제공사를 시작하였는데 무임노력제공에 시달린 면민들이 생계가 막연함에도 이를 제지할 방도가 없던 차, 우리 형님(註; 박종선 1902년생)의 5-6세 때라 기억된다고 하니 정미년(丁未 1907년) 가을 어느 날 동네 앞 성(城) 위에서 “오늘밤엔 검은 옷을 입고 외출을 금한다”는 함성이 있은 다음 저녁식사 후 군강공원에서 총성이 연발 후 조용해졌는데 다음날 ‘오미’란 자가 총환에 중상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풍선편으로 목포에 가서 치료하다가 사망한 것이다. 그 뒤 일본인의 식산회사가 창설되어 진도읍 포산방조제를 신축간척사업으로 포산평야가 이루어졌으나 일본인 거주자는 별로였고 장판(長坂)과 복도일랑(福島一郞)외 2-3명이 상주하고 상인으로는 중리(中利), 도천(桃川), 대교(大橋) 등이 잡화상을 경영하였으나 별 치산도 없고 우리 지방 상인에 밀려 근근하였으나 약종상과 전매사업만은 일본인이 우위 하였으나 실권은 지방인이 장악하였기 관공인을 합하여 20호 미만으로 일본인학교 아동이 12-13명에서 15-16명이 고작이었다.」
/최혁 기자 kjchoi@namdonews.com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