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회 능주의 동학농민혁명>
올바름이 도도하던 능주, 구한말에도 의로움이 넘치다
갑오혁명 당시 동학군, 능주 관아에 집강소 설치 민생 돌봐
능주는 전라도 4 牧 중 하나 인구·면적 월등해 동학勢도 커
조종순 등 농민군 수십 명 사살당해…無名 희생자도 상당수
 

능주목지도 . 872년 제작된 <지방지도>의 능주목. 능주(綾州)는 전남 화순 지역의 옛 지명이다. 삼한시대 마한에 속한 능주는 죽수부리(竹樹夫里)였다. 죽수(대나무) 부리(넓은)라 불리게 된 것은 대나무 밭들이 많아서였다. 죽수는 능주의 오래전 이름이다. 백제 때는 이릉부리(爾陵夫里)였으며 신라 때(757년)는 능성군(能城郡)으로 불렸다. 1632년(인조10)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具氏)의 고향이라 하여 능주목으로 했다. 1895년 23부제실시 때 나주부의 능주군이 되고 다음해 전라남도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화순군에 합쳐 능주면이 됐다.

 

 

일제 시대의 능주전경. 정면 앞쪽 건물이 능주공립보통학교이다./화순군 능주면 양승광씨 제공

능주는 백제시대 때 ‘이릉(爾陵)부리’라 불렸다. 왕릉과 묘가 있는 넓은 고을이라는 뜻이다. 부리란 넓은 벌판을 뜻하는 벌의 다른 이름이다. 통일신라 때까지 능주는 이릉부리 군(郡)이었다. 757년(경덕왕 16)에 이릉부리 군은 능성(陵城)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지역에서는 금성(나주)과 무주(광주), 능성(능주)이 가장 큰 고을이었다.

고려 태조(왕건) 940년에 능성(陵城)군은 능성현(綾城縣)으로 개명됐다. 언덕 릉(陵)을 사용하던 능성(陵城)이 비단 릉(綾)의 능성군으로 바뀐 것이다. 능성(綾城)은 비단처럼 아름다운 산과 구릉을 지닌 성(城)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1413년 전국의 행정구역을 8도로 개편하면서 전라도 능성현이 됐다. 임진왜란 때 관아와 향교가 불타고 백성들이 큰 피해를 입으면서 1597년(선조 27)에 화순현에 병합됐다.

이후 1611년(광해군 3) 능성현으로 다시 분리됐다가 1632년(인조 10)에 능주목(綾州牧)으로 승격됐다.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성본(姓本)이 능성(능주) 구씨(具氏)였기 때문이다. 능주는 목으로 승격돼 1895년까지 263년 동안 목사고을로 자리했다. 능주목 관할 구역은 지금의 능주, 춘향·이양, 청풍·도곡·도암·한천·화순, 동복 일대였다.

조선시대에는 전국 8도에 20개의 목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능주였다. 목(牧)은 함경도 1개를 비롯 평안도 2개, 황해도 2개, 경기도 3개, 강원도 1개, 충청도 4개, 경상도 3개, 전라도에 4개의 목사고을이 있었다. 전라도에는 전주와 나주, 광주, 능주 등 4개의 목사고을이 있었다.

지금의 행정구역 편제로는 능주가 화순군에 속해 있는 면이지만 그 이전에는 능주의 위상이 화순보다 더 높았다. 능주는 목사고을이 되기 전에도 종 5품이 다스리던 현령고을이었다. 화순과 동복은 종 6품이 있던 현감고을이었다. 그 당시의 직급은 관찰사(도지사)-목사(시장) -현령(군수)-현감(면장) 순이었다.

1759년에 편찬한 <여지도서>를 보면 능주목의 호구와 인구는 각각 5천33호와 1만9천650명이었다. 화순현은 1천715호에 5천777명이었다. 동복현은 2천106호에 7천390명이었다. 능주목이 두 고을을 합한 인구보다 더 많았던 것이다. 1895년의 갑오개혁으로 능주는 나주부 관할의 능주군(3급)이 됐다. 화순군과 동복군은 4등급이었다.

1908년 화순군이 폐지되면서 능주군으로 편입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1913년 능주와 화순, 동복을 통폐합하면서 화순군으로 개명했다. 목사고을 능주가 면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당시 능주는 인구나 면적, 위치에 있어서 화순보다 월등했다. 가장 큰 고을이었지만 의로움과 항일정신이 컸기에 일제가 능주를 의도적으로 축소, 배격해버린 것이다.

갑오년(1894년) 12월에 호남초토사 민종렬이 조정에 보고한 <전라도소촉소획동도성책>(全羅道所促所獲東徒成冊)과 1895년 1월에 관군이 전라도 각읍에서 노획한 동도(동학농민군을 일컬음)의 수효와 장령의 성명을 적은 성책 <전라도각읍소획동도수효급장령성명병록성책>(開國五百四年 正月 日 全羅道各邑所獲東徒 數爻及將領姓名병錄成冊)에는 능주·화순지역에서 처형하거나 체포한 농민군 기록이 있는데 이를 참조해보면 능주, 화순, 동복 일대 농민군의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다.

능주지역의 동학도 체포와 처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위의 두 기록에서 발견되고 있다.

“능주에서는 동학 우두머리 13인을 12월 11일에 잡았는데 그 가운데 7인은 잡은 즉시 포살했으며 나머지 6인은 일본군이 효수(梟首)하여 경고를 삼았다. 능주의 우두머리 조종순(趙宗栒)을 1895년 1월 11일에 관군 순포장(巡砲將) 최주화(崔周華) 등이 잡았고, 권익득(權益得)·손영기(孫永己)는 22일에 잡혔는데 물고를 냈다. 이는 장흥의 김영집(金永集)이 잡은 바다. 오병채(吳秉采)·이중백(李仲伯)은 같은 날 잡혔는데 방수장(防守將) 이지무(李枝茂)가 잡아 물고를 냈다. 장강다구(張江多九)는 전 우후(前虞侯) 박종규(朴鐘奎)가, 서민수(徐泯洙)는 방수장 윤자경(尹滋慶)이, 이득수(李得洙)는 남평에서 잡아 보내왔다. 정치구(鄭致九)·김기홍(金基弘)은 전 현감(前縣監) 이득수(李得秀)가 잡았는데 이들은 모두 가두어 두었다. 이학서(李學西)는 방수장 윤자경이, 문춘서(文春西)·이도춘(李道春)·박채중(朴采仲)은 방수장 이기무가, 김학준(金學俊)은 방수장 양주묵(梁周默)이 맡았는데 모두 읍에서 알아보고 방면했다.”

/최혁 기자 kjchoi@namdonews.com

<박스>

동학농민군이 집강소를 설치했던 능주 관아

 

 

 

능주관아의 정문인 죽수절제아문. 객사복원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동학농민혁명 당시인 1894년 음력 7월 동학농민군은 능주관아에 집강소를 설치했다. 능주를 방문했던 일본인 우미우라(海浦篤彌)는 <동학당시찰기>에 동학농민군 집강소를 이렇게 묘사했다.

“대도소는 능주 관청을 본영으로 삼았으며 사람과 말이 많았고 흰색 목면 천으로 깃발을 만들어 문밖에 둘렀다. 영기(令旗)를 마당 가운데 세워 위엄을 높였다.”

동헌과 객사(客舍) 등이 있었던 능주 관아 자리에는 현재 능주면사무소가 들어서 있다. 동헌이 있던 곳에는 이를 기념하는 비가 서있다. 오래된 나무들이 곳곳 자리하고 있어 이곳이 동헌 터였음을 짐작케 해준다.

죽수절제아문(竹樹節制衙門)은 동헌(東軒)인 녹의당(綠倚堂)의 정문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기단은 석재로 낮게 쌓았고, 초석은 커다란 덤벙주초를 놓았다. 주초 위에는 민흘림 기둥을 높게 세웠다. 출입을 통제하는 판장문 중앙을 옆보다 넓게 꾸미고 문 위에 홍살을 꽂아 위엄들 더했다.

화순군은 능주 내아와 동헌을 복원해 내아는 면사무소 사무실로, 동헌은 회의실로 사용하고 있다. 현재 20여억 원을 투입해 능주목 객사를 복원 중에 있다. 능주목 객사는 인헌왕후와 이순신 장군이 숙박을 한 것으로 알려져 관광명소로서의 스토리텔링 작업이 요구되고 있다.

 

 

 

 

 

1938년에 찍힌 죽수절제아문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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