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백제·고려 건국 도운 공신 후예
전문식 영암입향…많은 인걸 배출
대대로 충절·효행 정신 계승
수래정·충효문 등 유산 보존

의로운 형제…‘충과 효’ 도리 지킨 가문

수래정 전경

전남 영암 서호면 은적산 자락에는 800년 전통의 엄길마을이 있다. 장천리 선사유적이 있는 살기 좋은 마을에서 대대로 세거하는 천안전씨 가문에는 역사에 길이 빛나는 형제들이 있다. 국토참절의 전란을 맞아 의(義)로써 항거하다 목숨 바친 형제들은 조선의 국가 이념이었던 ‘충과 효’의 도리를 실천한 상징적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엄길마을에서 충효를 실천하고 있는 천안전씨(天安全氏) 두평군파 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본다.

◇백제 건국공신 전섭 도시조
천안전씨는 환성군 전섭을 도시조로 모신다. 그는 백제 온조왕의 건국을 도운 아홉 공신 중 한사람으로 십제공신에 봉해졌다. 그의 29세손인 전락은 왕건이 견훤군과 싸운 대구 공산전투에서 신숭겸장군과 함께 싸우다 순절해 천안부원군에 책봉됐다. 그를 중시조로 모시는 천안전씨가 세대를 잇고 있다. 37세인 전려(시호는 강숙공)는 고려 충렬왕 때 정당문학·대제학을 역임하고 두평군에 책봉됐다. 그가 전라도(강진 작천)에 입향해 천안전씨 두평군파를 열었다.

전려의 손자인 39세 전문식(1331~?, 호는 도은, 시호는 문평)은 당시 국자좨주였던 정몽주의 문하에서 학문해 문과 장원급제하고 형부상서사, 정당문학을 역임했다. 그는 공양왕을 옹립했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길에 조선개국 소식을 듣고 은거해 두문불출했다. 태조의 수차례 출사 권유를 거절하다가 정종의 청을 받아들여 경상백으로 선정을 베푼 후 물러나 유람으로 여생을 보냈다. 전북 진안 영산사에 배향됐다. 46세 전승문(1484~?, 호는 길촌)은 연산군 치세에 향촌에 은둔한 처사로서 동생 전승무와 함께 영암 서호 엄길마을에 입향했다.

◇전몽성 형제들 빛나는 충효정신
49세 전몽성(1561~1597)은 무과 급제하고 선전관, 군기사주부를 지내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 의병장 휘하에서 금산전투에 참전하고 관찰사 이광이 이끄는 부대의 선전관으로 의주행재소로부터 한양까지 어가를 호위했으며 함평현감을 역임했다. 이후 낙향해 어머니 봉양에 힘쓰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동생 전몽진, 김덕흡, 유장춘 등과 함께 의병 창의해 영암 해암포 전투 중에 화살이 떨어지자 ‘신하의 도리’를 외치며 적진에 뛰어들어 순절했다.

전몽진(1565~1597)은 같은 전투에서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동생 전몽태(1571~?)는 전란 중 형제를 대신해 어머니를 모신 효자로서 무과 급제하고 생질(누이의 아들)이었던 창성방어사 김완 장군과 함께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록에 올랐다. 형제의 충절과 효행을 기려 나라에서는 전씨충효문(전라남도 기념물 제71호)을 내리고 영암 장동사(전라남도 기념물 제109호)에 배향했다.

전몽성의 아들인 50세 전여홍(1578~1659)은 순절 소식을 듣고 원수를 갚기 위해 이순신 장군 막하에 나가 묘도와 노량해전에 참전해 공을 세우고 선무원종공신에 녹선 됐다. 그의 동생 전윤홍(1581~1625)은 무과 급제하고 유원첨사로 재직 중 순직했다. 또다른 동생 전순홍(1587~1669)은 무과 급제하고 예빈사주부를 역임하고 낙향해 은거했다.

◇인재 배출하고 유적 보존에 힘써
51세 전택(1612~)은 인조 때 문과 급제해 해미현감, 안동판관, 양덕현령을 역임하고 낙향해 시묘살이 후 복직하지 않았다. 전의(1627~1690)는 음사로 벼슬에 나가 군자감정을 지냈다. 전재빈(1661~1751)은 문과급제하고 남포현감, 괴산군수를 역임한 후, 장예원판결사에 올랐다. 55세 전영택(1776~1835)은 문과급제하고 벼슬은 성균관전적, 병조정랑을 거쳐 홍문관직제학에 올랐으며 월강집을 남겼다. 전종행(1788~1836)은 문과급제하고 사직서주부, 소격서령을 역임하고 동정집을 남겼다. 56세 전광택(1767~1821, 호는 극복재)은 진사시에 합격하고 신병을 치유한 후 시문과 경학을 강론하며 후학양성에 매진했으며 극복재유고집을 남겼다. 전광원(1830~1893)은 무과급제하고 부호군을 역임한 후 낙향해 병서와 경서 강론으로 후학양성에 힘썼다.

후손들은 하절기에는 수래정에서, 동절기에는 원경재에서 학당을 열어 교육하면서 미풍양속을 가꾸는데 앞장섰다. 종가는 800년 된 느티나무처럼 넓은 그늘을 만들어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며, 교지·문집 등 고문서와 충효문정려, 수래정, 장동사, 원경재 등 유산을 보존하고 선조의 얼을 계승하는데 힘쓰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종택
충효문 정려
충효문 충신정려 판액. 충신 전몽성에게 나라에서 하사한 정려임
충효문 효자정려 판액. 효자 전몽태 정려 판액
장동사 사당
장동사 외삼문
원경재
엄길마을 느티나무. 800년 마을 역사를 수령으로 하는 고목 보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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