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절의 양팽손 ·의병 양응정 후손
부국강병·수군육성 국방책 주장
병법 배운 제자들 왜란승전 이끌어
국난마다 의병 창의로 정신계승

‘약무호남 시무국가 若無湖南 是無國家’ ...의병정신 '선각자' 가문

양씨삼강문 전경
양씨삼강문 전경

광주 광산구 어등산 자락에는 500년 역사를 간직한 박산마을이 있다. 풍전등화에 빠진 임진·정유 7년 전쟁에서 백전백승으로 서남해 제해권을 장악한 이순신장군이 난중일기에 ‘약무호남 시무국가’라고 기록하며 초개처럼 목숨 바친 호남의 향병과 의병을 예찬했다. 무엇이 호남의 민초들을 구국의 횃불로 만들고 해전과 육전에서 침략군을 격퇴시키게 했을까? 무엇이 이들을 한 점 두려움도 없이 적진에 뛰어들게 하고 여인들조차 자결할지언정 굴복하지 않는 기개를 발휘하게 했을까? 그 정신적 근원은 어디서 왔는지 궁금하다. 박산마을에 터잡아 왜적 침략을 예견하고 부국강병을 주장하며 천문지리·병법에 능한 선비 의병장들을 양성한 선각자가 송천 양응정이다. 유명·무명의 영웅들에게 충절 투혼을 심어 준 ‘의향’의 선각자 집안 제주양씨(濟州梁氏) 송천공파 한림종가를 찾아 의병정신을 계승한 가문의 내력을 살펴본다.

◇기묘명현 학포공 가학 이어
제주양씨는 탐라국을 건국한 3을나 중 양을나(良乙那)를 시조로 모신다. 559년 신라 진흥왕에게 사신으로 간 양탕이 성을 하사받아 양씨(梁氏)로 개칭했다고 한다. 후손 양순은 신문왕 때 신라에 들어가 한림학사를 역임하고 한라군에 군봉돼 후손들은 그를 중시조로 모신다. 고려 명종 때 유격장군을 지낸 양보숭을 1세조로 유격공계는 세계를 잇고 있다. 광주 양과동 충덕사에서 추모한다. 5세 양석재(1310~?)는 고려 충혜왕 때 문과급제하고 공민왕의 개혁을 돕고 왜구, 홍건적 등 침략한 외적을 격퇴하고 국토 수복에 공을 세웠으며 벼슬은 문하시중에 올랐다.

11세 양팽손(1488~1545, 호는 학포)은 송흠의 문하에서 학문해 조광조와 함께 문과 급제하고 사가독서하며 평생 뜻을 같이하는 동지가 됐다. 그는 정언, 전랑, 수찬, 교리 등을 역임하고 중종조 소격서 혁파와 위훈 삭제 등 사림의 개혁에 앞장섰으며 기묘사화에 대표상소자로 항소하다 삭탈관직의 화를 입은 기묘명현이다. 조광조가 화순 능주에 유배돼 사약을 받자 기꺼이 시신을 수습한 우정이 널리 알려졌으며 인근에 학포당을 짓고 은거했다. 21년만에 복직해 용담현령으로 공직을 마감하고 아들 8형제(양응기, 양응태, 양응정, 양응필, 양응덕 등)를 비롯한 후진 양성으로 여생을 보냈다. 수원 심곡서원, 능주 죽수서원에서 조광조와 함께 추모한다.

◇전란 예견 문무겸전 제자 양성
12세 양응정(1519~1581, 호는 송천)은 당대 8대문장가로서 가학을 이어 경학은 물론 병법까지 연구해 아들들과 제자들에게 전란을 대비하게 한 선각자였다. 그는 1555년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고 양달사, 백세례를 의병장으로 출전시켜 ‘최초 의병 승전’을 일궈냈다. 이듬해 왜구와 여진족을 제압할 부국강병정책인 ‘남북제승대책’을 주장하는 책문을 지어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고시관으로 ‘천도책’을 출제해 율곡 이이를 장원선발하고 이후 율곡과 철학문답을 주고 받음으로써 율곡의 10만양병설에 영향을 줬다. 병법을 배운 그의 제자들이 임진왜란에 큰 공을 세웠는데 최경회, 박광전, 김덕우, 안중묵, 최경운, 최경장, 신립, 정운, 백광훈, 백광성 등의 제자들에게 전란을 예고하고 수군 증강과 진법 등 병법을 익혀 전란에 대비토록 했다. 양산숙 등 아들들을 율곡, 우계 등에게 배우게 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수련함으로써 환란이 일어나면 의병을 모아 국은에 보답하도록 가르쳤다.벼슬은 광주목사, 진주목사, 대사성, 경주부윤, 이조참의를 역임했고 공조참판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송천집을 남겼다.

13세 양산숙(1561~1593)은 우계 성혼의 제자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주(현재 광주 광산구 박산마을)에서 창의해 김천일 의병군과 함께 한양을 되찾기 위해 상경, 수원, 용인, 강화 전투에서 활약하고 적진을 뚫고 의주행제소의 임금에게 삼남의 정세를 보고 했고 왕명을 전라도와 경상도에 하달했다. 그는 상주를 거쳐 2차 진주성 전투에 참여해 분전 끝에 남강에 투신, 순절했다. 그의 형제 양산룡은 김천일 의병군에서 군량을 조달하고 진주성전투 순절 의병군 시신을 수습했고 정유재란에 순절했다.

◇10인 충효열 기리는 삼강문 보존
양응정의 정부인 박씨는 정유재란에 나주 삼향포에서 왜적을 만나자 절개로써 투신했는데 아들 양산룡, 양산축이 구하자 뜻을 굽히지 않고 다시 투신해 순절했다. 두 아들 역시 어머니와 함께 순절했다. 양산룡의 부인 유씨, 양응정의 딸 김광운 부인양씨, 그 며느리 양씨(양응정 손녀) 역시 강물에 투신했다. 양산숙의 부인 이씨 역시 투신했으나 여종들이 구했지만 임산부인 양산축의 아내를 피신시키고 왜적을 승달산으로 유인한 후 은장도로 자결했다. 임환의 부인인 양응정 손녀 양씨도 일가가 배를 타고 이동할 때 왜선을 만나 일가를 구하고 투신해 순절했다. 나라에서 양씨일가의 충효열을 기려 9개의 정려를 모아 삼강문을 건립했다. 14세 양만용(1598~1651, 호는 오재)은 양산축과 부인 고씨(고종후 딸)의 아들로서 문과 급제하고 한림학사, 시강원설서, 예문관검열, 예조좌랑을 역임하고 1636년 청나라가 침입하자 의병을 일으켰다. 군수·현감 등 외직과 수찬, 집의, 응교 등을 두루 거치면서 정치제도 개선에 공을 세워 영국원종공신에 녹훈됐다. 그가 한림종가를 열었다. 가문의 의병 전통은 어등산의병운동의 기초를 이루고, 양진여, 양상기 부자 의병장으로 이어졌으며, 양한묵 등의 독립운동, 광주학생운동, 4·19, 5·18 등 광주전남 지역의 정의로운 운동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13대를 잇고 있는 종가 후손들은 박산마을의 양씨삼강문과 고문서, 문집 등 유산을 보존하며 정신 계승에 힘쓰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박산마을 앞 어등산의병전적지 표지석
박산마을 앞 어등산의병전적지 표지석
양씨삼강문 현판. ‘3세9정려’라고 새겨 일가족 삼대에 걸쳐 10명이 순절하고 9명이 정려를 받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양씨삼강문 현판. ‘3세9정려’라고 새겨 일가족 삼대에 걸쳐 10명이 순절하고 9명이 정려를 받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임류정. 양응정이 삼강문 뒷산 언덕에 세웠던 정자가 임류정인데 현재는 멸실되고 마을 앞에 모정을 세워 현판을 걸었다.
임류정. 양응정이 삼강문 뒷산 언덕에 세웠던 정자가 임류정인데 현재는 멸실되고 마을 앞에 모정을 세워 현판을 걸었다.
박산마을 전경. 종가는 중앙의 흰색 단층 가옥이다.
박산마을 전경. 종가는 중앙의 흰색 단층 가옥이다.
삼강문 삼세구정려 전경
삼강문 삼세구정려 전경
양씨삼강문 입구.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1호
양씨삼강문 입구.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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