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신농씨 후손 한림학사 노수 신라로
평장사 노해 식읍 광주를 본관으로
노만 중시조, 노희서 종가 열어
대통령 배출한 가통 계승에 힘써

덕행·충의·효행 빛나는 빛고을 명문가

구원재. 노씨삼릉단의 시조 10부자를 제향하는 제실.
노씨삼릉단 전경

광주의 진산 무등산 북쪽 삼각산 자락 오치동에는 대통령 두사람을 배출한 명문가의 시조 제단이 있다. 광주를 본관으로 북구 일곡동에 세거하며 효행과 의행으로 풍속을 이끌었던 광주노씨의 삼릉단이 그곳이다. 중국에서 동래한 후 1100여년을 이어 온 뿌리 깊은 가문 광주노씨 회재공파 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본다.

◇제나라 노현 지명따라 성씨 창성
노씨는 고대중국의 염제 신농씨에서 비롯됐다. 염제 후손인 강태공의 11세손 노혜가 제나라 노현(盧縣)의 지명을 따라 노씨(盧氏)를 창성했다. 당나라 한림학사를 지낸 노수는 선종 때 8학사와 더불어 아들 9형제를 거느리고 동도해 신라에 정착함으로써 삼한의 도시조가 됐다.(859년, 신라 헌강왕) 9형제 후손들은 광주백 노해, 교하백 노오, 풍천백 노지, 장연백 노구, 안동백 노만, 안강(경주)백 노곤, 연일백 노증, 평양백 노반, 곡산백 노항 등을 분관조로 분계했고 광주 북구 오치동에 노씨삼릉단과 구원재를 세워 매년 향사한다.
노수의 큰아들 노해는 당나라 한림학사를 역임하고 신라에서 광주백에 봉해짐으로써 노씨의 본관은 광주가 됐다. 그의 후손 노만(996~1064)은 문과 급제하고 벼슬은 문하시랑평장사에 올랐으며 선정을 베푼 공으로 광주군에 봉해졌다. 오치동에 있는 그의 묘소 옆에 삼릉단을 세웠으며 그를 중시조로 모시고 광주군계가 세대를 잇고 있다. 2세 노천유는 상서를 지내고, 3세 노아조는 평장사에 올라 가문이 중흥된다.

◇역사 굴곡마다 의로운 인물 행적
13세 노준공(1340~1397, 시호는 절효공)은 고려말 두문동에 은거한 충신으로, 그가 3년 상복을 입고 시묘를 살았던 효행과 호랑이가 보호했다는 일화가 알려져 나라에서 효자정려를 하사받았다.(고려사절요) 14세 노영방은 경서를 섭렵한 문장가로 좌찬성을 역임했으나 낙향해 석천에 정자 짓고 강회와 시론하며 유유자적했다.(동국명현록) 14세 노영국은 나주목사, 병조참판을 지냈고, 15세 노광리는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다. 22세 노극창(1482~1551, 호는 송계)은 문과 급제하고 남원·담양군수, 광주목사를 역임하고 임억령 등과 도의로 교유했다. 노수신(1515~1590, 호는 소재)은 사림에게 존경받은 문신으로 문과급제(장원)하고 시강원사서를 역임하고 을사사화,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돼 순천, 진도 등에 유배됐다. 진도의 결혼 풍속 교화 일화가 전해진다. 복권돼 대사헌, 이조판서, 대제학,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역임했고, 기축옥사에는 정여립을 천거했다는 이유로 탄핵받아 파직됐다. 소재집을 남겼고 시호는 문간공으로 충주 팔봉서원, 진도 봉암사 등에 배향됐다.

◇강학공간 일신재 보존 필요
23세 노희서(1558~1592, 호는 회재)는 궁마에 뛰어나 무과 급제하고 병절교위을 역임한 후 낙향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 의병군의 일원으로 금산전투에서 순절했다.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돼 금산 칠백의총 종용사와 절효사에서 추모한다. 그가 회재공파를 열었다. 그의 충견이 금산까지 따라가 주인의 담배쌈지를 입에 물고 돌아왔다는 일화가 있다. 노윤발(?~1593)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 막하에서 활약하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했고, 그 행적이 충무공전서에 기록됐으며, 원종공신철권을 하사받았다.

노경덕(호는 영포)은 성리학에 밝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고 팔량치 의병군에 합류해 군량 보급에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에는 함평향교를 복구해 제향하고 오위도총관에 제수됐다. 노언방(1708~1786, 호는 동정재)은 문과 급제해 성균관전적, 예조정랑을 거쳐 전라도사·해운판관을 역임했다. 현대에 이르러 노무현 대통령(광주백계)과 노태우 대통령(교하백계)을 배출함으로써 명가의 전통이 더욱 빛났다. 후손들은 가문 전통의 자부심으로 삼릉단 등 유적을 보존하며 선조의 학덕 계승에 힘쓰고 있다. 38세인 회재공파 15대 종손 노한종씨는 “효자정려, 절효사, 일신재는 학문하고 강학했던 소중한 역사문화 공간이므로 잘 보존되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영모재. 노씨삼릉단 경내에 광주군 노만을 추모하는 제실이다. 종손 노한종씨가 보존 관리에 힘쓰고 있다.
광주노씨 회재공파 종회소
노씨삼릉단 표지석. 노무현 대통령이 세웠다.
노씨삼릉단 표지석. 노태우 대통령이 세웠다.
광주노씨 도시조 노수 단비
절효사. 노준공(절효공)과 노희서(회재공)을 추모하는 사당
노준공 효자정려와 절효사유허비.
노준공 효자정려 현판
일신재. 절효사 사우 경내에 있으며 강당 현판이 남아 있어 학당이었음을 알 수 있고 일곡동 경노당이 마련되기 전까지 경노당으로 활용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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