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는 원래 전남 영광군 칠산 앞바다 해역 지칭
18세기 윤두서 ‘동국여지지도’서 확인
조선 후기부터 해상 매매시장으로 지칭
일본어민, 조선해역서 계절어업 본격화
현재 개념 ‘파시’ 19세기후반 무렵 사용
서해, 상품성 높은 조기·청어잡이 형성

 

윤두서의 동국여지지도 일부/해남윤씨 전시관 제공

위의 그림은 18세기 초반에 윤두서(1668~1715)가 그린 ‘동국여지지도’ 중 일부이다. 이 지도는 조선 초기인 1463년에 정척(鄭陟)과 양성지(梁誠之)가 만든 ‘동국지도’에 새로운 지리정보를 추가하여 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지도에는 이전에는 없던 다양한 섬들과 물길이 표시되어 있어, 연해 및 도서 지역에 대한 해남 윤씨가의 관심이 반영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전라도 무장(현 전북 고창)과 영광 법성포와 주변 해역을 보여주는 부분을 보면,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일종의 밭을 의미한다고 생각되는 ‘파시전(波市田)’이 바다에 표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흔히 옛 문헌에는 파시전(波市田)이나 파시평(波市坪)이라는 글자가 발견되는데, 섬사람들이나 어민들 사이에서는 ‘파시’가 많이 알려진 용어이다. 지금도 서해 낙도에 가면 파시가 있었던 화려했던 시절을 회고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어민들이 기억하는 파시는 특정 어종의 어기가 되면 어장 주변에 형성되는 임시 상업 시설이다. 그런데 조선 전기까지 파시평(波市坪) 혹은 파시전(波市田의 ‘파시(波市)’는 앞서 18세기 윤두서의 동국여지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전남 영광군 앞의 칠산바다 안쪽 해역을 지칭하였다. 칠산바다는 조수의 진퇴처도 아니고 갯벌이 발달한 지역은 아니지만, 얕은 수심의 바다가 넓게 펼쳐져 있어 이미 고려시대부터 그물어선어업이 발달하였다.

그러다 조선 후기 언제부터인가 파시가 점차 해상매매시장이나 어장 주변의 어업근거지를 지칭하는 보통명사로 바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일제시기 한 일본인 학자가 ‘파시’를 어물을 매매하는 해상시장으로 정의하며, 한말의 서해 주요한 파시로 전남 칠산탄과 황해 연평도(현 인천광역시)를 비롯해, 충청도 오천 녹도(현 충남 보령시), 서천 개야도, 죽도 (현 전북 군산시) 및 황해도 옹진 용위도, 장연 몽금포 등을 들고 있다. 이 도서 지역은 바다에 사는 다양한 물고기 중 상품성이 높은 어종을 좇아 각지의 어선과 상선이 일시에 모여드는 어장 주변에 위치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로 인해 주민들만 살던 적막한 섬은 각지에서 모여든 어민과 상인, 그리고 이들을 위한 숙소, 가게, 식당, 술집 등이 어기 동안 밀집하면서 도회지와 비슷한 곳이 된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한말의 파시나 현재 어민들이 기억하는 파시는 대개 19세기 후반 일본어민이 조선해에 계절 어업을 하기 시작하면서 생겨난 것이 많다. 조선 후기 서해에서는 상품성이 높은 조기, 청어를 쫓아 원정 어업을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 서해 몇몇 곳에 파시와 같은 곳이 형성되었다. 전국에서 모인 어선이 어획한 물고기를 바로 상고선에 넘기면 상고선이 물고기를 육지로 운송하기 때문에, 어선은 어기 내내 바다 한가운데 떠서 조업하는 경우가 많았다. 선원들은 기상이나 물때가 안 맞으면 가까운 섬에 들어가 쉬면서 필요한 물품도 구입하고 술도 마시면 놀기도 하였다.

목포 삼학도에서 이뤄진 파시 풍경./목포시 제공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상품성이 높은 어종이 많지 않아 파시를 형성할 만큼 경제성이 높은 어장도 상대적으로 많지도 않았다. 또 어장에 가더라도 주변에 대개 지금의 해양경찰처럼 수군진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 감시를 받았다. 또, 정기적으로 국가에 납세할 의무도 있었기 때문에, 조선 관리는 주요 수세처인 어장 주변을 엄격히 관리하였다. 그래서 조선시대 ‘파시(波市)’는 요즘 어민들이 기억하는 파시처럼 유흥업이나 매춘업 등이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제시기가 되면 파시의 성격이 이전과는 많이 달라진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내에서 관습 어장제가 폐지되었고 무엇보다 자유 무역이 확대되면서, 서일본의 일본 어민들은 조선해로 원정 어업에 나서게 된다. 일본인은 일본인이 선호하는 어종을 쫓아 (마치 이전에 조선 어민들이 하였던 것처럼) 어기에 따라 서해 낙도에 근거지를 두고 근해에서 원정 어업을 하였다. 여기에 1883년 ‘조일통어장정’의 체결에 따라 조선 땅에서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었다.

일확천금을 쫓아 조선에 온 일본 어민들은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어기 내내 조업하였으며, 한 어종의 어기가 끝나면 다른 어종을 쫓아 조선 내의 다른 곳으로 원정 어업을 다녔다. 이들은 기상이나 물때가 맞지 않아 조업에 나가지 않는 날에는 일본에서도 멀리 떨어진, 그것도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낙도에서 술집과 기생집을 드나들며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다. 이로써 조선 후기 발전한 파시는 일본 어민에 의해 퇴폐적인 성격이 강화되어 갔다. 여기에 일제시기 어업이 확대되면서 어업 기간 동안에는 여성과의 성관계를 피하는 등 금욕적인 생활을 유지하곤 하였던 조선의 종래 어민들과 성격이 다른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어업으로 유입되면서 파시의 퇴폐적인 성격은 더 강화되었던 듯 보인다.

그러나 일본인의 파시가 지역 주민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던 듯 보인다. 새로운 파시는 섬주민이 거주하는 마을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자리 잡는 경우가 많았고, 가까운 곳에 자리 잡더라도 마을 주민은 어민들과의 접촉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 어장에서 잡힌 어류도 조선인의 선호어종이냐 일본인의 선호어종이냐에 따라 완전히 상이한 경로로 유통되었다. 전자는 바다에서 바로 상고선에 실려 내륙의 주요 포구로 운반되었다. 반면, 후자는 낙도에 정박하고 있던 일본의 무역선에 실려 멀리 일본으로 운송되었다. 따라서 일본인이 선호하는 어종을 잡는 어민들은 섬에 근거지를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이처럼 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파시는 19세기 말에 자리 잡기 시작해, 광복을 거쳐 20세기 후반까지 지속되었다.

한때(아마도 어장이었던) 법성포 앞바다를 이르는 지명이었던 파시는 해상시장을 이르는 보통명사가 되었다가 이제는 조용한 낙도에서 특정한 어종의 어기에 어장을 따라 일시적으로 형성되는 상업 유흥 문화를 가리키는 용어로 기억되고 있다.

글/오창현(목포대 고고문화인류학과 교수)

정리/김우관 기자 kwg@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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