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란(조선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이영란 조선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

사군자(四君子)인 매난국죽(梅蘭菊竹)은 매화, 난초, 국화, 그리고 대나무이다. 매화는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꽃으로 겨울에서 초봄으로 가는 즈음에 꽃을 피운다. 외유내강의 의미가 있는 난초는 묵묵히 피어나 그윽한 향기를 풍기는 식물이다. 국화는 가을의 풍성함을 말해주듯 소복하게 꽃송이를 담아내고, 대나무는 사계절 내내 그 푸르름을 드러내며, 그 마디 마디에 절개를 보여준다. 보통 매난국죽은 문인들이 절개와 굳은 의지를 표현할 때 그리는 대표적 그림 소재이다.

이러한 식물, 동물을 그려 자신의 열정과 굳은 의지로 나라를 위한 마음을 표현하고자 하였던 중국 혁명 운동가 하향응(何香凝·허샹닝)은 1878년 홍콩에서 태어났다. 하향응이 태어나기 이전 1860년 청왕조는 제2차 아편전쟁 패배로 영국에 주룽(九龍)반도를 넘겨야 했다. 하향응이 태어난 19세기 홍콩은 영국의 주요 무역항으로 주룽반도∼광동 간 철도를 개통하였고, 영국식 교육을 도입하여 영국식 문화가 자리 잡은 아시아 대표적 지역으로 1898년에 영국은 홍콩을 99년간 조차(租借)하였다.

영국식 문화가 자리 잡은 홍콩에서 태어나서였을까. 하향응은 어머니의 전족 강요를 거부하고 큰 발을 소유하였다. 전족하지 않은 여성은 결혼하기 힘들었던 시대에 큰 발을 소유한 하향응(18세)을 오히려 반기며 아내로 맞이한 사람이 바로 요중개(20세· 廖仲愷·랴오중카이)이다. 그와 하향응은 광주에서 결혼하였고(1898년), 그들은 혁명의 동지이자 인생의 반려자로 서로 도움을 주는 부부로 결혼생활을 하였다.

동경 혼고여자미술학교(東京本鄕美術專門學校, 1909∼1911)에서 회화를 공부하였던 하향응은 그림으로 자신의 혁명 열정을 보여주었다. 하향응은 광주와 홍콩에 오랫동안 거주하면서 중국 영남화풍의 대표인 진수인(陳樹人)에게 배운 그림을 선보였다. 그녀는 1921년 ‘여계출정군인위로회(女界出征軍人慰勞會)’에서 그림을 판매하여 모은 모든 자금을 혁명에 사용하였다.

하향응은 남편과 함께 손문(孫文·쑨원), 송경령(宋慶齡·송칭링)을 도와 중국 혁명에 가담하였는데, 1925년 8월 20일 남편 요중개가 암살당하였다. 하향응은 “10월에 거듭 산봉우리 매화를 본다. 붉은 매화는 눈과 서리를 비웃으며 오만하게 피었구나. 매난국죽이 다 모여도 유산에 홀로 핌을 부러워한다”라고 하였다. 그녀는 서리와 눈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산봉우리를 덮은 매화는 우파와 군벌의 횡행 속에서 그들의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북벌을 완수시켜야 함을 토로하였다. 하향응은 비통함과 함께 남편 영전앞에 미완성의 혁명 사업을 완성하겠다는 맹세를 하였다. 또 그녀는 남방 화교에게 그림을 팔아 중개농공학교(仲愷農工學校) 운영자금을 마련하기도 하였다(1929년).

1929년 6월 남경에 거행된 손문의 국장 이장식에 참가하였던 하향응은 국민당에서의 모든 직책을 버리고 장제스와 결별하고 프랑스로 떠났다. 하향응은 2년 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곧 귀국하여 상해에서 ‘국난을 구제하기 위한 서화 전람회 선언(救濟國難書畵展覽會)’에서 항일 부상병을 위해 모금을 하였다. 1938∼1941년 보위중국동맹에서 화교로부터 의연금을 모집할 때 사례로 그림을 보내는 등 그녀는 자신이 그린 그림으로 나라를 구하는 자금줄 역할을 하였다. 이때 그녀가 그렸던 총 37폭의 그림 중 송, 매, 국, 죽, 산수화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 그림의 소재인 식물들은 혹독한 겨울을 이기는 식물로서 당시 혹독한 정치 환경 속에서도 불굴의 혁명 의지를 표출하기 위함이었다.

1949년 후반 하향응은 혁명의 승리에 따른 기쁨을 화려한 채색과 명쾌하고 호방한 기풍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녀는 매난국죽의 그림뿐만 아니라 사자 그림 3폭, 호랑이 그림 5폭의 동물화를 그리면서 자신의 혁명 열정과 함께 나라를 위한 감성을 그림으로 승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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