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꿈을 향한 도전
떨어지고 또 떨어졌다…‘4전 5기’의 도전

30세때 목포서 무소속 출마 낙선
순전히 ‘정치’하고자 가족과 상경
장면 박사와 인연으로 민주당 입당

1958년 강원 인제서 출마 또 고배
자유당 정권 방해로 후보등록 무효
이듬해 보궐선거 흑색선전에 무너져

4·19 후 실시 네번째 선거도 실패
연속된 낙선에 가세 기울어 ‘생활고’
아내마저 세상 떠나 ‘엎친데 덮친격’

1961년 인제 보선서 마침내 승리
5번 도전끝에 첫 당선 기쁨 맛봐
5·16 쿠데타로 박정희와 악연 시작

 

김대중은 1961년 5월 13일 실시된 강원도 인제군 보궐선거에 5번째 국회의원 도전에 나선다. 사진은 당시 인제 신남중학교에서 열린 김대중 후보 유세 모습. 이 선거에서 김대중은 4전 5기 끝에 당선의 기쁨을 맛보지만 3일 뒤 516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국회의사당에서 서보지도 못한다./연세대 김대중 도서관 제공 .

김대중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1월 발생한 ‘국민방위군 사건’과 1952년 5월 부산 정치 파동을 보며 정치에 뛰어들기로 마음 먹는다. 남한과 북한이 서로의 총을 겨누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몰아넣은 광경과 부산까지 피난 내려온 정부가 정신을 못 차리고 집권 연장을 위해 난리 피우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정치가 제자리를 찾으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굳게 갖는다.

“내게는 가슴 뛰는 사건이자 고난의 시작이었다”. 김대중이 정치입문 당시를 떠올리면서 자서전에 적은 말이다. 이 표현처럼 김대중에게 정치는 시련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금뱃지를 향한 꿈은 떨어지고 또 떨어지면서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첫 선거 결과는 10명 중 5등

김대중은 6·25 전쟁이 끝난 직후 실시된 1954년 제3대 국회의원(민의원) 선거에 입후보한다. 당시 헌법은 민의원과 참의원 등 양원을 구성하도록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여러 이유로 양원 구성을 미루고 있었다. 국회는 상원 격인 참의원 없이, 하원 격인 민의원만 구성돼 있었다. 국회의원 선거도 ‘민의원 선거’로 불렀다.

그의 나이 30세때였다. 출마 지역은 전남 목포였다 . 정당은 무소속이었다. 여당인 자유당에는 곁에도 가기 싫었고, 야당인 민주국민당의 공천 제의는 거절했다. 노동조합 영향력이 막강한 상황에서 목포지구 노동조합이 김대중을 지지한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제2대 총선에서도 노조 출신이 당선된 바 있었다.

그런데 경찰, 군청 등 관권이 선거에 개입하면서 노동조합의 김대중 지지와 선거운동을 방해했다. 경찰은 당시 노동조합이 여당인 자유당을 지지하는 기관단체라는 약점을 잡아 간부 전원을 체포하고, 자유당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각서를 쓰게 했다. 정당이 없는 무소속 후보에게는 이런 난관을 뚫고 나갈 힘이 없었다. 투표 결과는 10명 중에서 5등이었다. 낙선으로 정치인 첫 행보를 시작한 셈이었다.

낙선의 아픔에도 많은 것을 깨쳤다. 정당 기반없이 선거를 치른다는 것은 너무 힘들었다. 또 돈이 엄청나게 들었다. 김대중은 선거 이듬해인 1955년 목포를 떠나 서울로 향한다. 순전히 ‘정치’를 하기 위해서다.

“아내는 묵묵히 이삿짐을 꾸렸다. 그런 아내가 고맙고 미더웠다. 우리는 어린 자식 손을 잡고 떠나왔다. 하지만 그 후로로도 목포는 분에 넘치도록, 눈물겹도록 많은 것을 내게 안겨주었다.”(김대중 자서전)

김대중은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서 목포에 무소속으로 첫 출마했으나 낙선했다(앞줄 왼쪽에서 넷째). 이후 4전 5기 끝에 61년 인제에서 처음 당선됐다./연세대 김대중도서관 제공

◇인제 선거때 박정희와 조우 불발

김대중은 서울 남영동에 집을 마련하고, 부인 차용애는 미장원을 차렸다. 그리고 한국노동문제연구소 주간으로 활동하며 동아일보와 사상계 등에 노동 관련 글을 기고하는 등 활동폭을 넓혀간다. 웅변학원도 운영했다. 훗날 정치적 동지가 된 김상현과 김장곤도 웅변학원에서 만났다.

또 부통령 선거에 나선 장면 박사와의 인연으로 민주당에 입당한다. 1957년 7월 13일 천주교 서울대교구청 노기남 주교의 집무실에서 윤형중 신부의 주례로 세례성사를 받았다. 대부는 뒤에 총리를 지낸 장면이었다.

세례명은 토마스 모어(Thomas Moore)로 유토피아를 쓴 영국의 정치가이자 인문주의자로, 헨리 8세에게 반역자로 몰려 사형당했다가 뒷날 성인으로 추대된 인물이다. 김대중은 “왜 하필 목 잘린 사람의 이름을 내 세례명으로 지어 주는가 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고 자서전에서 기록하고 있다.

첫 선거 4년 뒤(1958) 제4대 총선거에서 김대중은 강원도 인제군에서 출마한다. 인제는 38선 이북으로 6·25 전쟁 전에는 북한 땅이었다가 6.25 전쟁 때 수복돼 우리 땅이 된 지역이었다. 고향 목포에는 이미 다른 후보가 자리를 잡고 있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당시에는 부재자투표제도가 없어 김대중은 인제에 주둔한 젊은 군인들과 그 가족들이 부패한 현실에 실망해, 야당을 지지할 것으로 판단하고 연고도 없는 인제를 선택했다. 소위 ‘지역감정’이란 것이 생기기 전의 일이었다. 그는 여당 측의 방해를 뚫고 ‘호박 꼭지 도장’까지 만들며 천신만고 끝에 등록하긴 했으나 등록 무효 처리가 됐다.

서럽고 분통이 터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당시 상황은 ‘후보 등록 방해사건’으로 언론에도 크게 보도되었다.

“군청 근처에 있는 육군 사단장 관사를 찾아갔다. 군은 이 억울함을 알아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사단장은 자리에 없다고 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도 나를 피했던 것 같다. 당시 사단장은 박정희였다. 우리의 첫 대면은 이렇게 빗나갔다.”(김대중자서전)

박정희는 1957년 7월 인제 지역의 육군 제7사단장을 맡았고, 1959년 3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고 몇 달 뒤, 제6 군관구사령관(서울)으로 부임하기 위해 인제를 떠난다. 만약 이때 김대중과 박정희가 만났으면 향후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됐을 지 추측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다.

첫부인 차용애 여사와 장남 김홍일 전 의원(오른쪽, 15~17대 의원), 차남 김홍업 현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왼쪽, 17대 의원).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치료 한 번 못하고 떠난 아내

김대중은 ‘등록무효’가 너무 억울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선거 무효소송을 냈고, 대법원은 선거무효를 선고했다. 보궐선거가 실시됐다. 다시 떨어진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김대중에게 왜 표를 주느냐” “김대중이 빨갱이 활동을 했다”는 흑색선전에 그는 무너졌다. 김대중의 생애 상당 기간 따라다닌 ‘빨갱이’라는 낙인찍기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흑색 선전의 예로 김대중은 전남 광양출신의 이도선을 자서전에 기록했다. 이도선은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김대중과 나는 함께 자랐습니다. 서로 고추까지 만지면서 컸는데 왜 모르겠습니까? 그는 틀림없는 공산당원입니다. 내가 오죽하면 여기까지 와서 호소하겠습니까. 공산당에 속지 마십시오.” 고 연설하고 다녔다. 눈물까지 흘리며 그럴듯하게 호소했다.

6·25 수복지역으로 최전방 인제는 민간인들도 거의 북쪽 출신이라서 ‘반공’으로 뭉쳐있었다. 빨갱이라는 흑색선전과 군대 내까지 파고든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로 또다시 낙선한다. 1954년 목포, 1958년 인제, 1959년 인제에서 계속 떨어진 것이다.

선거는 연속해서 떨어지고 생활은 바닥을 향했다. 한 번만 출마해도 기둥뿌리가 뽑힌다는 게 선거였다. 낙선에 따른 실의와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에게 아내 차용애가 세상을 떠난다. 32살 나이였다. 엎친데 덮친격이었다.

김대중이 정치를 하겠다고 서울로 올라와서 가세가 궁핍해져 여덟번 이사하고, 미장원을 하며 살림을 도우면서도 결코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리지 않던 아내였다. 김대중은 부인을 잃은 심정을 자서전에 이렇게 기록했다.

“세상이 온통 푸르른 여름의 끄트머리였다. 돌아보면 아내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받았는데, 그것을 한 번도 갚지 못했는데 내 곁을 떠났다. 아내는 자주 가슴앓이를 했다. 그날도 가슴앓이가 심해 약을 먹었는데 그것이 어찌 잘못되었는지 혼수상태에 빠졌다. 마침 집에 있던 나는 의사를 부르러 뛰어나갔다. 의사와 함께 집에 오자 아내는 숨져 있었다. 부러울 것 없는 부잣집 딸을 데려와 고생만 시켰다. 병이 났어도 제대로 치료 한 번 받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갔다. 나는 통곡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앞줄 왼쪽에서 첫째)이 1950년대 목포와 부산을 오가며 해운업에 종사하던 시절./연세대 김대중도서관 제공
김대중은 1961년 5월 13일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서 4전5기 도전끝에 첫 당선의 기쁨을 맛본다. 하지만 당선증 수령 이틀만인 5월 16일 5.16 군사쿠데타가 발생해 박정희와 김대중의 악연이 시작된다. 사진은 5.16주요세력, 왼쪽부터 박정희 소장, 박종규 소령, 이낙선 소령, 차지철 대위./나무위키 캡처

◇당선증 받고 만감 교차

4·19혁명으로 서울의 봄이 오는 듯 했다. 김대중은 새 헌법에 따라 1960년 7월 29일 실시된 제5대 민의원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다시 나선다. 지역구는 이번에도 인제였다. 당시 민주당은 국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국회의원이 될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금뱃지는 여전히 멀게 있었다.

선거법이 개정되면서 부재자 투표 제도가 도입된 게 결정적이었다. 유권자의 80%가 되는 인제군의 군인들 표가 각자 고향으로 보내졌다. 김대중에게는 직격탄이었다. 토착민들이 토박이임을 내세운 후보에 몰표를 몰아주면서 1천표 차로 낙선한다. 그 해 선거에서 민주당이 민의언 233석 중 175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뒀음에도 김대중은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본인은 낙선했지만, 장면 총리의 신임을 얻은 김대중은 집권 민주당 대변인으로서 주가를 높였다. 여당 대변인으로서 매일 각종 연설회와 공개 토론에 나가 여당의 정책과 입장을 설명했다. 열심히 준비하고 진지하게 얘기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야당, 혁신계, 무소속 그룹의 대변인들과 싸웠다. 사람들은 김대중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김대중은 어느새 준비된 대변인, 인기 대변인으로 자리잡았다.

1961년 봄이 되면서 시위도 잦아들고 정권도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김대중에게도 강원도 인제발 봄바람이 불었다. 1960년 선거에서 1천표 차이로 당선된 경찰서장 출신 민의원이 3·15 부정선거 개입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의원 자격을 박탈당한 것이다.

그리고 5월 13일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다시 출마해 이겼다. 고향 목포에서 1954년 낙선한 이래 1958년, 1959년, 1960년 내리 4번의 패배만에 처음 맛보는 승리였다. 선거판에 뛰어든 지 만 7년만이었다.

인제군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민의원 당선증을 받고 만감이 교차했다. ‘이 한 장의 당선증을 위해 그간 그토록 고생을 했단 말인가.’ 세상을 뜬 아내 차용애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당장 묘소로 달려가 당선증을 보여주고 싶었다.

14일과 15일 이틀동안 당선 인사를 다녔다. 주민들은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주민들을 보면서 정치에 뛰어들때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바른 정치를 펴리라. 저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리라.’고.

승리의 낮과 밤은 그렇게 지나가고, 운명의 5월 16일 아침을 맞는다. 밤새 세상이 바뀌었다. 박정희가 군사구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김대중과 박정희의 악연은 이렇게 시작된다.
/김명식 기자 msk@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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