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정치 입문 동기
전쟁 포화 속 국민 외면한 위정자 보며 정치에 입지

서울서 청년실업가 활동중 전쟁 발발
400㎞ 걸어서 20일만에 목포 도착
공산당에 우익반동 몰려 총살 운명
생애 5번 죽음 위기중 첫 위기 극적 넘겨

국민방위군 부패로 국민 수만명 죽음
“거짓말로 나라 위기·국민 절망 몰아”
부산 피란중 이승만 정치 파동 목도
“정치 제자리 찾기 위해 고난 시작”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 자체가 한국 현대사다.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유신, 군사독재 등 김 전 대통령이 걸어온 길은 한국 현대사의 질곡이 오롯이 투영돼 있다. 사진은 목포공립상업학교 재학시절 김 전 대통령.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제공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 자체가 한국 현대사다.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유신, 군사독재 등 김 전 대통령이 걸어온 길은 한국 현대사의 질곡이 오롯이 투영돼 있다.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향한 의지는 투옥과 연금, 망명의 고통을 딛고 마침내 인동초(人冬草)처럼 피어올라 헌정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와 해방 후 첫 남북정상회담이란 열매를 맺었다.

김 전 대통령도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다. “돌아보면 파란만장한 일생이었다. 정계에 입문해 국회의사당에 않는데까지 9년, 1970년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후 대통령이 되기까지는 무려 27년이 걸렸다. 다섯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고, 6년간 감옥에 있었거, 수십년 동안 망명과 연금 생활을 했다. 대통령 후보, 야당 총재, 국가 반란의 수괴, 망명객, 용공분자 등 나의 호칭이 달라질 때마다 이 땅에는 큰 일이 있었다.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김대중 자서전 22p)

김 전 대통령은 한국 정치사의 거목(巨木)이기도 하다. 그의 정치는 통합과 협력의 정치, 화해와 미래로 가는 정치였다. 국익과 국민 통합을 위해선 과거의 어떤 악연을 다 초월하는 결단도 보여줬다. 작금의 정치권을 보고 있자면 화해, 용서, 관용의 정치를 강조했던 김 전 대통령의 위대함은 빛을 더한다. 그야말로 ‘정치 실종’의 시대를 맞았기 때문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의 기본인 대화와 협상, 그리고 상생의 자세는 찾아보기 힘든 게 현실이다.

이에 남도일보는 김대중대통령추모사업회(회장 정진백)와 공동으로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김 전 대통령의 리더십과 정책, 국정관리 능력을 재평가해보자 ‘DJ에게 길을 묻는다’를 연재한다. 1부는 ‘하의도에서 청와대까지’란 주제로 김 전 대통령의 생애 및 정치역정을 엮어낼 예정이다.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 김 전 대통령의 생가.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제공

◇작은 섬마을 출신 청년실업가

1924년 1월 6일, 김 전 대통령은 전남 무안군(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반도 서남쪽 끝에 자리한 하의도는 목포에서 34㎞ 떨어진 외딴 섬이었다. 섬마을 소년 김대중은 숱한 추억이 서린 고향이 좋았다. 후광(後廣)을 자신의 아호로 삼을 정도였다.

아버지 김운식은 낭만적이었다. 부드러운 성품에 음악적 재능도 뛰어났다. 어머니 장수금은 강하고 엄격했다. 섬마을 소년 김대중이 엿장수의 짐보따리에서 담뱃대를 훔쳤다가 어머니의 호된 회초리 세례를 받은 적이 있다고 전해진다.
 

1943년 목포상고 재학시 반장을 맡었던 소년 김대중(왼쪽 네번째)의 모습.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제공

교육열이 남달랐던 어머니가 전답을 팔아 뒷바라지해 준 덕분으로 섬마을 소년 김대중은 목포로 유학, 목포공립상업고등학교(현 전남제일고)에 수석 합격했다. 5년제 목포상고는 당시 전국에 알려진 명문고였다. 김대중은 입학과 동시에 취업반 급장을 맡았다.

우등생이었던 김대중은 3학년 때 진학반으로 옮겼다. 만주에 있는 건국대학교를 가기 위해서다. 하지만 일제치하 속 현실은 암울했다. 이미 한반도를 비롯한 주변의 정세가 극도로 혼미했다.

“건국대학교는 등록금은 물론 숙식까지 무려였다. 그러나 그해 겨울(1941년 12월) 일본은 기어이 미국과 전쟁을 시작했다. 내일이 불투명하고 현실은 암울하기만 했다. 전쟁으로 만주를 가는 것도 여의치 않고 들려오는 것은 온통 우울한 소식뿐이었다. 그 뒤부터는 공부도 싫어졌다.” (김대중 자서전 48p)

그는 졸업 후 강제징집을 피해 일본인이 운영하던 해운회사에 취직했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그는 회사 경영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됐다. 김대중은 회사 관리인으로 사업수완을 발휘, 목포일보까지 경영하는 등 청년실업가로 성장했다.

해방공간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이 좌우익을 망라해 구성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 좌익계열이 주도권을 잡자 환멸을 느껴 탈퇴했다. 건준에 몸을 담은 이력은 그를 평생 ‘색깔론’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한 멍에이기도 하다.

김 전 대통령은 1963년 제6대 국회의원과 1967년 7대 국회의원에 연이어 당선돼 야당 정치인으로서 활발한 의정활동을 펼쳤다. 사진은 정치입문기 김 전 대통령.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제공

◇포화 속에서 피어난 정치 열망

20대에 해운회사와 신문사를 경영하는 성공한 청년실업가 김대중이 정치판에 뛰어들게 한 동기는 두가지로 요약된다.

첫 번째는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이 터진 6월 25일, 청년실업가 김대중은 서울에 있었다. 꼼짝없이 서울에 갇혔던 김대중은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함께 갈 사람들을 모아 무작정 남쪽을 향해 걸었다. 서울에서 목포까지 거리는 400여㎞. 서울을 탈출한지 20일 만에 목포에 도착했다.

이때 동족 간에 서로 적이 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참혹함을 겪으면서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헌신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한국전쟁 중 1951년 1월 발생한 ‘국민방위군 사건’도 일어났다. 1·4 후퇴 때 제2국민병으로 편성된 국민방위군 고위 장교들이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착복한 것이다. 당연히 병사에게는 의복이나 식량이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 길 위에서 굶어 죽는 자, 얼어 죽는 자들이 속출했다. 사망자만 수만명에 달했다.

그는 한국전쟁 중 우익반동이란 이유로 공산당에 붙잡혀 투옥됐으나 총살 직전에 탈출, 생애 5번의 죽을 고비 중 첫번째 고비를 극적으로 넘기기도 했다.

“나는 한국전쟁을 겪으며 지도자가 거짓말하는 것을 보았다. 위정자의 빈번한 거짓말은 결국 나라를 위기로 몰아갔고, 국민을 절망 속으로 밀어 넣었다. 지도자가 깨끗하지 못하면 사회가 혼탁하고, 국민을 기만하면 나라가 무너진다는 것을 느끼고 보았다. 정치가 바르지 못하면 인권은 짓밟히고 생명과 재산도 지켜 네지 못한다는 사실을 사선(死線)을 넘으며 가슴에 몇 번이나 새겼다.” (김대중 자서전 86p)

또다른 정계 입문 계기는 부산 정치 파동이었다.

1952년 5월 25일부터 7월 7일, 대한민국 헌법 제2호 공포까지의 기간 동안 한국전쟁 중 대한민국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서 일어난 일련의 정치적 소요사건이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재선을 위해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 이원제를 골자로 한 헌법 개정안(발췌 개헌)을 통과시켰다. 폭력을 동원해 강제로 국회의원을 연행하고 구속하기도 했다.

당시 사업차 부산에 체류하고 있었던 김대중은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방송하고서 부산으로 도피해 온 이승만 대통령이 전쟁으로 희생당하고 비참한 연명을 하는 국민은 외면하는 것으로 보고 충격을 받았다.

“국민의 뜻이 아닌데도 독재 정권은 민의(民意)를 도용해 국회를 무력화시키고 헌법을 멋대로 고쳤다. 나는 국민을 섬기는 참다운 민주주의가 아니면 국민이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정치가 제자리를 찾으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됐다. 나는 정치에 뛰어들었다. 내게는 가슴 뛰는 사건이자 고난의 시작이었다.” (김대중 자서전 86~87p)

그가 헤쳐나간 반세기 정치역정의 서막은 이렇게 열렸다.
/안세훈 기자 ash@namdonews.com

※참고문헌 : ‘김대중 자서전’(김대중, 삼인,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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