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하의도서 청와대까지
①정치 입문 동기
②꿈을 향한 도전

납치·구속·회유 굴하지 않고 군사독재에 ‘저항’
5·16군사쿠데타 발발 악연 시작
‘준비된 의원’으로 의정활동 두각
대선 후보 선출 국민 지도자 부상
부정선거·지역감정 못넘고 ‘분패’

영구집권 획책 박정희 탄압 거세져
납치·수장 위기서 가까스로 살아
연금·구속에도 민주화 투쟁 앞장
민심 거스른 박정희, 심복 총탄 맞아

김대중과 박정희, 두 사람은 생전에 단 한 번 만났다. 김대중이 1967년 목포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직후인 1968년 새해였다. 김대중이 당시 야당 인사들과 함께 청와대로 신년 인사를 갔고, 그때 선채로 박정희와 5분 정도 얘기를 나눴다. 얼굴을 대면한 것도, 말을 주고 받은 것도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김대중과 박정희는 대한민국 60~70년대 현대사에서 독재와 민주주의라는 대척점의 상징이었다. 박정희는 김대중을 향해 끊임없는 탄압을 했고, 김대중은 이런 박정희에게 굴복하지 않고 저항한다. 이런 관계는 장장 18년간 이어진다.

김대중이 1971년 4월 18일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대통령선거 유세를 하는 모습. 이날 유세장에는 100만명의 청중이 모였고, 김대중은 생애 최고의 열정을 불태워 연설했다. /김대중평화센터도서관 제공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유세장 청중들에게 함께 인사하고 있는 김대중-이희호 부부./김대중평화센터도서관 제공

◇3일만에 빼앗긴 국회의원

악연의 시작은 1961년 발생한 5·16 군사쿠데타다. 쿠데타 발생 3일전에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서 4전 5기 끝에 국회의원 당선증을 받아든 김대중은 16일 아침, 쿠데타 소식을 듣는다. 부랴부랴 서울로 올라온 그는 박정희가 이끄는 쿠데타 세력이 국회를 해산하면서 국회의사당에서 서보지도 못한다. 정치활동까지 금지당한다.

1963년 2월 정치활동 금지가 해제된 김대중은 그해 11월 26일 실시된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목포에서 출마해 당선된다. 국회에 등원한 김대중은 끊임없는 노력과 연구로 혜성처럼 빛난다. 한일 국교정상화 추진에 야권이 강경 반대를 할 때 무조건 반대보다는 독도 문제와 일제 침략에 대한 사과를 받는 등 무엇을 얻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훗날 그가 강조한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 감각’에서 나온 판단이었다.

그는 국회 도서관을 가장 많이 이용한 국회의원으로 도선관 직원들은 기억했다. 국내외 정책과 현안 등을 그만큼 많이 했다. 여론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면밀히 검토했다.

부단한 고민과 연구는 의정활동에 그대로 나타났다. 상임위원회 출석한 장관과 일문일답식 질의 응답 도입이 한 예다. 당시에는 의원이 장황하게 질문을 읽어가면 장관은 실무진이 준비해 준 답변 원고를 간단히 읽는 게 관행이었다. 알멩이는 빠지고 겉돌 수 밖에 없었다.

일문일답식 질의응답은 늘 긴장감이 감돌고 질문자나 응답자 모두 사전에 많은 준비를 해야 했다. 이런 준비를 거쳐 김대중은 상임위는 물론 국회 본회의 발언에서도 문제점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팩트와 논리를 앞세워 국무총리를 비롯 장관들을 매섭게 추궁했다. 쩔쩔매는 각료들을 보고 박정희는 “아니 그 많은 장관들이, 그 많은 인재들이 어찌 김대중 한 사람을 당해내지 못하는 거요. 한두 번도 아니고 도대체 어찌된 일이오.”라고 다그쳤다고 한다. 김준연 의원의 구속동의안을 막기 위한 ‘5시간 19분’ 필리버스터도 준비된 노력의 산물이었다.

박정희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군사정권의 실정을 정면으로 공격해 박정희를 몇 번이나 곤경에 빠뜨렸다. 그 댓가는 혹독했다. 1967년 6월 8일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막이 올랐다.

김대중이 목포에 출마한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유세장은 연설이 끝나도 청중들이 떠나지 않았따. 사인을 요청하는 인파가 몰려 소동이 벌어지곤 했다./김대중평화센터도서관 제공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을 낙선의 표적으로 삼았다. 중앙정보부와 내무부 간부들을 청와대 불러 “이번 선거에서 김대중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낙선시켜야 한다. 여당 후보 열 명이나 스무 명이 떨어져도 상관없다. 하지만 김대중만은 절대 당선시켜서는 안된다”고 지시했다고 한다.

김대중의 의정활동을 지켜본 박정희로선 향후 자신의 대통령 존위를 흔들 인물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는 모든 공권력을 동원해 할 수 있는 부정과 편법을 준비한다. 유령 유권자 조작, 부정 투표, 부정 개표, 매수, 협박 등을 총동원할 것이란 말들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심지어 선거를 앞두고 박정희가 목포까지 와서 공화당 후보를 위해 직접 지원 유세를 하고, 국무회의를 아예 목포에서 열었다. 정부 각료들이 줄줄이 내려와 공단 조성, 비행장 건설 등 갖은 ‘꿀단지’ 공약을 쏟아냈다. 모든 장관들이 좁은 목포에 모였으니 청와대가 유달산 기슭으로 옮겨온 셈이었다.

목포 시민들의 관심은 자연스레 박정희가 왜 이리 집요하게 쓰러뜨리려 하느냐로 옮겨갔다. 마침내 시민들은 김대중이 대통령감이라 미리 그 싹을 자르기 위해 저렇듯 광분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김대중을 향한 ‘큰 인물’ 여론이 형성됐다. “김대중은 목포의 아들, 우리가 키우자”고. 목포의 전쟁이었다.

목포가 끓어올랐다. 유세장엔 어린 소녀부터 선창가 좌판 상인 등 인산인해였다. 사인을 받으려는 인파들이 연일 장사진이었다. 만일 부정선거를 감행하면 목포발 4·19가 발발할 분위기였다. 결과는 민심의 승리였다.

1973년 8월 13일 밤, 일본 동경에서 납치당한 김대중이 자택인 동교동으로 돌아온 직후 전화를 받고 있는 모습./김대중평화센터도서관 제공

◇선거에서 지고 투표에서 지다

두 사람은 1971년 대선에서 직접 맞닥뜨린다. 그토록 떨어뜨리려 했던 김대중이 대통령 후보로 박정희 앞에 나타난 것이다. 3선개헌을 통해 독재의 기반을 다진 박정희는 김대중이 대선 후보가 되자 당혹해 했다.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은 회고록에 70년 9월 신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김영삼 후보에 역전승을 거둔 날의 박 전 대통령을 이렇게 묘사했다. “표정은 시푸르덩하였고 앞엔 한두번 빨다가 비벼끈 담배꽁초들이 재떨이에 수북이 쌓여있었다.”

대선은 10년 군부독재에 대한 심판 성격이었다. 그동안 억눌린 국민의 불만과 비판이 ‘김대중’으로 표출됐다. 김대중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장충단공원유세에는 100만명이 운집할 정도였다.

김대중은 당시 상황을 자서전에 이렇게 적었다.

“장충단공원 일대에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기적처럼 100만명이 모였다. 환호와 흥분의 도가니였다. 독재에 대항하는, 민권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거대한 축제였다. 생애 최고의 감동이었다. 나는 외쳤다. ‘이번에 정권 교체를 못하면 이 나라는 영구 집권의 총통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김대중은 대선 공약으로 ▲향토예비군의 폐지 ▲대중 경제 노선의 추진 ▲미·중·소·일 4대국 안전 보장론 ▲남북한 화해와 교류 및 평화통일론 ▲초중등학교 육성회비 징수 폐지 ▲사치세 신설 ▲이중곡가제 실시 등을 내세웠다.

하나하나가 엄청난 파급력을 지녔다. 특히 향토예비군 폐지와 4대국 안전보장론, 남북 화해 및 평화통일론, 대중경제 노선은 폭발적 지지를 받았다. 당시 박정희가 용공으로 몰아세웠던 공약들은 나중에 자신이 도입하기도 했다.

결과는 94만 6천표 차 패배였다. 중앙정보부의 선거부정과 지역감정 조장을 이겨내지 못했다. 특히 부정선거는 전국에서 자행됐다. 투표용지 분실, 중복 투표, 대리 투표가 행해졌다. ‘선거에서 이기고 투표에서 졌다’는 말이 나왔다. 전문가들은 공정하게 선거를 치렀으면 김대중이 100만표 정도는 앞섰을 거라고 분석했다. 당시 중앙정보부 제1차장으로 근무했던 강창성 전 한나라당 의원조차 뒤에 “원칙대로 투·개표를 했다면 우리가 졌을지도 모른다”고 증언했다.

선거가 끝나자 김대중은 ‘대통령직을 빼앗긴 지도자’로 국민들에게 각인된다. 명실상부한 박정희 정권의 대항마로 자리잡는다. 김대중은 대선 한 달 뒤 열린 총선에서도 그 입지를 확인시킨다. 김대중이 가는 곳엔 대선때보다 더 많은 청중이 몰려왔다. 그의 인기에 한 후보자는 김대중이 탄 차량 앞에 드러누우며 지원 유세를 요청했고, 청중들은 2~3시간씩 늦게 도착해도 자리를 뜨지 앟고 기다렸다. 목포에서 광주로 오던 중 목숨을 잃은 뻔한 큰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아픈 몸을 이끌고 전국을 누볐다.

선거 결과 야당인 신민당은 전체 204석 중 89석을 차지했다. 개헌 저지선을 훨썬 웃도는 성과였다. 정당 득표율도 공화당 48.7%, 신민당 44.4%로 박빙이었다. 특히 서울 19개 선거구 중 18개에서 야당이 승리했다. 대선에서 ‘경상도 정권’을 외치며 지역감정을 부채질한 이효상 국회의장의 낙선은 최대 화제였다. 이대로 가면 민주주의가 말살될 것이라는 민심이 대선에 이어 총선에서도 확인된 것이다.

김대중은 1976년 재야인사들과 함께 민주화를 요구한 3·1구국선언으로 구속된다. 김대중 부인인 이희호(가운데)를 비롯한 구속자 가족들이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연좌시위를 하는 모습./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김대중은 1976년 재야인사들과 함께 민주화를 요구한 3·1구국선언으로 구속된다. 김대중 부인인 이희호(가운데)를 비롯한 구속자 가족들이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연좌시위를 하는 모습./김대중평화센터 제공

◇납치와 연금 구속 수난의 연속

민심 폭발은 곧 김대중의 수난으로 이어진다. 73년 8월 도쿄 납치사건은 박정희 정권 차원의 ‘김대중 죽이기’ 완결판이었다. 김대중의 경고대로 영구집권체제인 유신을 선포한 박정회는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민주주의 회복 운동을 전개하던 김대중을 납치해 한국으로 압송한다. 정권의 부통령 제안도 거부한 김대중이었다.

납치사건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도 큰 뉴스였다. 한·일 양국 외교 문제로 비화됐다. 납치는 여러 증언과 문건을 통해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지휘아래 총 46명이 9개조로 나뉘어 조직적으로 저지른 범행이었다. 누가봐도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정치테러였다. 그런데도 진상 규명과 원상회복은 ‘미완’이다.

박정희의 암묵적 승인으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저지렀을 것이라는 추측성 조사 결과만 있을 뿐이다. 누가 지시했는 지 구체적으로 밝혀진 건 없다. 한일 양국이 국제법에 따라 처리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모호하게 봉합한 결과다. 이에 대한 아쉬움을 김대중은 자서전에도 적었다.

납치 후 수장 위기에서 천신만고 끝에 살아나 강제 귀국한 김대중은 가택연금과 구속을 반복하며 정치적으로 매장당한다. 김대중 이름 석 자는 언론에서도 완전히 사라졌다. ‘형 집행 정지로 출옥한 원외의 모 인사’ ‘당외 인사’ ‘동교동 모씨’ 라는 해괴한 이름으로 지칭됐다.

김대중은 저항의 칼날을 거두지 않는다. 오히려 감옥행을 각오하고 투쟁 전면에 나선다. 1976년 재야인사들과 함께 민주화를 요구한 3·1구국선언이 대표적이다. 사슬퍼런 유신체제하에서 민주화 요구는 곧 구속이었다. 구국선언을 앞두고 김대중은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 “이대로는 안되겠습니다. 제가 감옥에 가야겠습니다”고 말한다.

구속 후 갖은 고문에도 신념은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1978년 9월 병실 감옥에서 들키지 않기 위해 ‘못으로’ 편지를 써 투쟁 방향을 제시하곤 했다. 편지에는 “올 가을이 중요한데, ‘물가 내려라’, ‘농민들의 곡가를 보장하라, 폭풍피해를 완액 보상하라’ 같은 국민 생활에 밀접한 이슈로 싸워라’”라는 내용을 빼곡히 적었다.

김대중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면서 박정희 정권 말기적 증상도 심해졌다. YH노조 신민당사 농성 강제 진압 과 김영삼 신민당 총재 국회의원 제명, 부마항쟁 진압을 위한 비상계엄령 선포 등 정권을 흔드는 대형 사건들이 잇달아 터졌다. 정권이 민심을 떠나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만사를 힘으로 밀어붙였다.

특히 민주화 투쟁의 불길은 전국으로 옮겨붙었다. 광주와 서울 등에서 대규모 시위가 예정돼 있었다. 4·19 처럼 국민 저항이 일어나는 중이었다. 유신의 독재는 갈수록 설 자리가 좁아졌다. 민심에 쫓기게 된 것이다. 그러던 1979년 10월 26일 늦은 시간 서울 궁정동에서 총성이 올렸다. 측근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를 겨눈 것이다. 박정희는 쓰러졌고, 이렇게 두 사람의 18년 악연은 마침표를 찍는다.
/김명식 기자 msk@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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