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항거 저항 의식…민주주의 투사 밑거름
군부정권 독재 대립·죽을고비만 5번 넘겨
1997년 15대 대통령 당선 개혁 정책 추진
대북 관계 개선·복지정책 등 잇딴 도입
IMF 위기 기업구조 혁신으로 타개 업적

 

1987년 광주를 방문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환영하기 위해 광주 시민들이 금남로에 모여있다. /연세대 김대중 도서관 제공
납치 사건 이후 전화를 거는 김 전 대통령의 모습.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전 별명은 ‘인동초’였다. 추운 겨울 온갖 추위와 바람에도 꿋꿋하게 살아남는 끈질긴 인동초의 생존방식이 마치 냉혹한 군부정권 아래 수많은 고초와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대한민국에 민주주의란 뿌리를 깊게 내리게 했던 그의 지난 인생길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 찬란한 빛을 발산했던 김대중. 한국 현대사에서 그가 남긴 여러 발자국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짙어지는 것도 이러한 이유일터다.

◇암울한 어린시절

1924년 1월6일 전남 무안군 하의면 후광리(현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태어난 김대중은 어쩌면 이 순간부터 평생 투사로서의 삶의 숙명을 안았지 않나 싶다.

당시 하의도는 일제(동양척식주식회사)에 손에 넘어가면서 주민들 대다수가 일시에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김대중의 아버지인 김운식은 주민을 대표해 일본인들에게 항의하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훗날 김대중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이 불의에 항거하는 힘을 준 것 같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평생 자신이 옳다 여긴 일엔 굽힘이 없던 그에게 어머니는 인생의 지침서였다.

어린 시절 김대중이 엿장수의 짐보따리에서 담뱃대를 훔쳤다가 어머니의 호된 회초리 세례를 받은 적이 있다고 전해진다.

이날의 일은 김대중에게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왜 그것을 구분하고 지켜야 하는지를 깨닫는 결정적 사건이 됐다.

학창시절 독서광이었던 김대중은 독서를 통해 넓어진 그의 지식과, 견문만큼이나 자신이 처한 현실적 괴리감에 치를 떨어야 했다. 일본 치하에 대한 반감이 커져가서다. 일본인 학생들과의 갈등 속에 그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긴 반일작문은 그의 학창 시절을 더욱 외롭게 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한 그는 목포상선회사 경리사원으로 입사하며 평범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단순한 회사 입사가 그가 정치인 김대중으로 가는 터닝 포인트가 됐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재판정

◇정치로의 행보

1945년 해방이 되면서 그는 회사 경영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됐고, 건국준비위원회 전남도 목포지부 선전부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잠시 공산계열 정당인 조선신민당에 입당하기도 했지만 ‘목포 파출소 습격 사건’ 이후 좌익활동에선 완전히 손을 뗀다. 신문사(목포일보)와 해운회사를 운영하던 그는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후 공산당의 인민재판의 모습을 직접 보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더욱이 자신의 대한청년단 활동 이력이 문제되며 인민군에게 붙잡히게 됐고, 처형될 위기도 겪는다.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진다.

그는 이후 장택상 전 총리 등과 교우를 쌓게 되고 1955년 민주당에 입당하게 된다. 앞서 이승만 정권 독재에 항거하며 1954년 제3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낙선 경험은 김대중을 더욱 꿈틀거리게 했다.

물론 정치인 김대중의 행보는 녹록지 않았다.

4~5대 총선서 연이은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1961년 5월14일 강원도 인제서 진행된 재보궐선거에서 어렵사리 민의원에 당선됐지만 불과 이틀여만에 5·16 군사쿠데타로 국회가 해산되는 아픔을 겪었다.

1963년 민주당 소속으로 고향 목포에서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재선)된 뒤에서 본격 정치인으로서 이름을 올렸다.

그렇게 마주한 30여년간의 군부정권(1960년~1980년대까지)과 맺은 악연은 그를 수차례 위기속에 빠뜨렸다.

1971년 발생한 ‘의문의 교통사고’ 를 시작으로 후유증 치료차 건너간 일본에서의 ‘중앙정보부 요원 납치사건(1973년)’,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내란죄에 의한 사형선고(1980년) 등 5차례나 죽음 문턱을 넘나들었다. 약 6년(누적 기간 포함)의 세월을 차디 찬 감방에 투옥됐으며 55차례나 가택연금도 당했다. 군부정권의 정치공작 속에 정치인생 내내 빨갱이란 억울한 누명에 시달려야 했다. 지역감정의 굴레도 그를 괴롭혔다.

그럼에도 그에겐 여전히 대한민국 국민이 남아있었다. 3번(1971년 7대, 1987년 13대, 1992년 14대)의 대권 도전 실패에도 그가 멈추지 않은 이유였다. 그는 지난 1997년 12월 제 15대 대한민국 대통령이 됐다. 대한민국 최초의 평화적 정권 교체이자 민주주의의 서막을 열었다.

“국민은 언제나 승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지막 승리자는 국민입니다<1993년 출간된 김대중 저서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에서 나온 구절>.
 

1998년 02월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열린 제15대 대통령에 취임식.

◇업적

김대중은 대통령 시절인 2000년 6월 대한민국 수립이후 처음 남북 정상 간 대화를 이끌어 냈다. 이 공로로 한국 유일의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됐다.

이는 화해와 포용을 전제로 남북한 교류와 협력 증대를 추구한 김대중 정부 대북 유화정책인 햇볕정책(공식명칭 ‘대북화해협력정책’) 탄생으로 연결됐다.

지난 1971년 대통령 선거 당시부터 주장해온 ‘한반도 전쟁 억제’ 정책의 연장선이었다.

대북송금, 북 핵개발 방치 등 여러 논란도 훗날 튀어 나왔지만 민족 간 대립 구도 타파 측면에선 높은 평가를 받았다.

김대중은 기초생활보장제도 도입, 건강보험공단 설립 등 복지정책에도 힘을 쏟았다. 공기업 민영화는 물론 고용 유연화 등 당시로선 획기적인 정책을 도입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다른 것이 아니란 평소 소신이 반영됐다.

대통령 임기 초 마주한 IMF 외환위기는 강도 높은 기업 구조조정과 금융, 기업, 노동, 공공 4대분야 개혁으로 타개했다.

무엇보다 자신을 투옥시킨 전 대통령을 용서한 김대중은 통합과 화합이 진정한 정치란 것을 몸소 보여줬다.

여전히 구태 이데올로기에 빠져 갈등과 반목을 보여주고 있는 현 대한민국 정치판에 커다란 울림을 주고 있다.
/심진석 기자 mourn2@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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