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정치적 권력 탐하지 않고
평생 ‘화해·용서·관용’ 정치로
진정한 민주화 이뤄내는데 헌신

의회주의자로 대화·타협하며
논쟁은 하되 물리적 충돌 지양
현 ‘정치 실종’에 시사하는 바 커
한반도·세계 평화에도 큰 족적

 

1998년 02월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열린 제15대 대통령에 취임식. /대통령기록관 제공

‘DJ의 정치’가 그립다. 작금의 정치권을 보고 있자면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우리에게 보여준 화합과 통합의 정치가 더 없이 소중해지고 있다. 그야말로 ‘정치 실종’의 시대를 맞았기 때문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의 기본인 대화와 협상, 그리고 상생의 자세는 찾아보기 힘든 게 현실이다. 극단으로 치우친 진영 대결 속 여야 정치권은 첨예한 대립과 정쟁을 이어가고 있다. 언제 끝날 지도 모른다. 여야 정치권이 오히려 극단적 국민 편가르기와 분열을 부추기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여기저기서 터져나온다.

DJ는 달랐다. 개인의 정치적 권력을 탐하지 않고 일평생 민주화투쟁을 계속했던 DJ는 화해, 용서, 관용의 정치를 꿈꿨다. 국익과 국민 통합을 위해선 과거의 어떤 악연을 다 초월하는 결단도 보여줬다.

故 이희호 여사와 주고받은 옥중서신에서도 DJ의 정치 철학은 드러난다. 그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진정으로 관대하고 강한 사람만이 용서와 사랑을 보여줄 수 있다. 항상 인내하고, 우리가 우리의 적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하자. 그래서 사랑하는 승자가 될 수 있도록 하자”고 썼다.

DJ는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서도 헌신했다. 전 세계 평화의 비전을 가지고 6·15 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뒀다.

오롯이 국민들만 바라보며 통합과 협력의 정치, 화해와 미래로 가는 정치를 추구한 DJ. 그래서 스스로 ‘행동하는 양심’이 됐다.

정치권에서는 올해 DJ 탄생 100주년을 계기로 한국 정치의 패러다임 전환에 대한 담론이 형성될 것이란 기대감이 높다.

무엇보다 DJ가 평생 강조했던 ‘화합·통합의 정치’를 실현하는 원년으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여기에 한국 정치의 폐단인 지역구도 청산과 정치개혁에 대한 요구도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재판정.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제공

◇DJ의 민주주의

DJ의 이름을 빼놓고는 민주화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한국 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DJ는 지금 우리 국민이 누리고 있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한평생 헌신했다. 다섯 번의 죽을 고비를 겪고 6년간 감옥생활, 40여 년간 망명, 연금, 감시당하는 삶을 살았지만 단 한 번도 좌절하거나 불의한 세력과 타협하지 않았다.

전두환 신군부가 1980년 5월 광주 5·18민주화운동을 내란음모로 조작, 사형선고를 내리고 회유했을때도, 1992년 노태우 전 대통령이 당 합당을 제안하고 다음에 대통령이 되도록 지원하겠다고 제안했을 때도 DJ는 거절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국민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제15대 대통령에 오른 DJ가 정부 명칭을 ‘국민의 정부’라고 결정한 것도 그의 정치 철학에 따른 것이다.

DJ는 대통령 취임사에서도 “국민이 주인 대접을 받고, 주인 역할을 하는 참여민주주의, 국민이 주인이 되는 정치”를 선언했다.

DJ가 추구한 민주주의는 다수결에 의한 단순한 절차적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의회 민주주의(정당정치)와 참여 민주주의(지방자치), 포용적 민주주의 실현이었다. 포용적 민주주의의 경우 여성, 중소기업인, 청년, 사회적 약자들인 노동자, 농민, 장애인 등의 대표를 국회에 입성(비례대표)시키는 포용과 통합국가로 나아가는 민주주의 정치를 뜻한다.
 

1971년 04월 18일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선거 유세

◇미래를 내다본 DJ

DJ는 대화와 타협을 추구하는 철저한 의회주의자로도 통했다. 논쟁은 하되 물리적 충돌은 지양했다.

정치가 실종된 현재 여야의 상황은 답답함 그 자체다. 대화와 타협하는 정치를 잊은 지 오래다.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정부·여당의 추진 정책에 번번이 제동을 걸고 나섰다. 다수 의석을 앞세워 쟁점 법안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집권당인 국민의힘은 이런 야당과 끊임없이 반목하며 대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 역시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로 맞대응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여야의 극한 대립은 더 가열될 공산이 크다. 오는 4월 10일 실시되는 제22대 총선에서 국민의힘은 현 여소야대(與小野大) 국회 상황을 뒤집어 국정을 반드시 안정시키겠다고 벼르고 있다. 민주당은 심판론 기치를 전면에 걸고 윤석열 정부를 견제할 다수 의석을 지키겠다는 각오다.

DJ는 미래를 내다보는 공부하는 정치인이기도 했다. 누가 시켜서 독서를 많이 한 것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책 읽는 것을 즐겼다.

책을 많이 읽다 보니 DJ는 연설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1971년 4월 신민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한 DJ의 서울 장충단공원 유세 연설이 대표적이다. 해당 연설에는 100만명에 가까운 인파가 몰렸다.

김 전 대통령이 해당 연설에서 “이번에 정권교체를 하지 못하면 이 나라는 박정희 씨의 영구 집권의 총통 시대가 온다”고 말했다.

박정희의 유신선포를 예고한 것이다. 또 대중 경제론, 3단계 통일론, 4대국 안전보장론 등 구체적인 비전과 정책도 제시했다.

DJ는 실사구시 정치인이었지만 변화하는 세계를 멀리 내다보는 역사적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정치인은 ‘선비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 감각’, ‘망원경적 역사인식과 현미경적 현실인식’을 겸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2000년 6월 15일 북한 평양시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제공

◇DJ의 평화

DJ는 평소 성경을 인용해 “평화는 정의와 입맞춤하는 정의의 열매여야 한다”고 말했다.

DJ는 자신을 죽이려했거나 탄압했던 사람들을 모두 용서하고 화해했다. 정의의 이름으로 일체의 정치적 보복도 없었다.

한반도 평화도 마찬가지였다. DJ는 대통령 재임시절 ‘햇볕정책’을 앞세워 남·북 간 적대감을 해소하고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적인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6·15 남북공동선언은 한반도 평화의 이정표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DJ는 민족 분단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2000년 6월 13일 평양을 방문해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을 이뤄냈다. 6·15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내는 성과도 거뒀다.

DJ는 남북교류협력을 민간이 주도하고 정부가 지원하는 ‘선민후관(先民後官)’ 원칙을 삼고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이산가족 만남의 정례화를 비롯, 남북 인도적 지원 및 교류협력, 개성공단 등 경제적인 상호협력, 금강산관광 및 문화교류협력들이 이어졌다.

동아시아 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해서도 부단히 노력했다.

DJ는 우선 한·미동맹을 굳건히 하고 화해·협력의 평화원칙을 외교정책의 근본으로 삼았다.

또 DJ는 1998년 5월에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선언했다. 같은해 10월에는 오부치 수상과 정상회담을 하고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이뤄냈다.

당시 화해와 협력에 의한 대일 평화외교정책은 일본 국민들뿐만 아니라 세계인들에게 감동을 주고 존경과 찬사를 받았다.

이후 같은해 11월에는 중국을 방문해 장쩌민 주석과 정상회담을 하고 ‘21세기를 향한 협력동반자관계’에 합의했다.

동티모르 독립과 미얀마 민주주의에 연대하고 지원하기도 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 10월, 노벨평화상 100주년이 되는 해에 노르웨이 노벨평화상위원회는 DJ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했다.

/안세훈 기자 ash@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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