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란(조선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이영란 조선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

개와 인간이 함께 하였다는 기원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신석기 부족의 쓰레기장에서 스스로 가축이 되었다는 스캐빈저 가설, 인간이 의도적으로 개를 만들었다는 피노키오 가설, 인간들이 의도적으로 혹은 우연히 아기 늑대를 기르며 가축화하였다는 사냥과 농사 가설 등등 여러 가지 설이 있을 만큼 인간과 개는 오랜 역사를 함께 하였다.

개는 인간에게 최초의 가축이며, 농경 생활을 시작하기 훨씬 전 인간과 함께 생활해 왔다. 오랜 역사 속에서 개와 인간의 관계는 다른 동물에 비해 친근하면서도 인간에게 어느 동물보다 충성스러운 모습으로 그려지곤 하였다. 한국 역사에서도 충성스런 개들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 첫 번째 이야기로 광주 양림동 근대 역사 문화마을에 전해오는 충견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광주 양림동 근대 역사 문화마을에는 1558년(조선 명종 무오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동부승지를 지낸 정엄(鄭淹·1530~1580)의 정려(旌閭) 즉, 효자 광주 정공엄지려(孝子 光州 鄭公淹之閭)가 세워져 있다.

사조참판(四曹參判)·팔도관찰사(八道觀察使)를 역임한 아버지 정만종(鄭萬鍾)과 권승금(權承金)의 딸 안동권씨(安東權氏)인 어머니 사이에 출생한 정엄은 1558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치다가 명종실록 편찬에 편수관으로 참여하였다. 뒤에 남원 부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매우 좋게 여겼다는 전라감사의 보고가 있었고, 1579년에 나주 목사일 때에도 선정비가 세워졌다는 등의 공식기록이 있다. 효성이 깊은 정엄은 1574년에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자 나주 목사를 자청하였다고 한다. 몸소 약을 달이며 어머님을 정성껏 간호하였으나 1579년 끝내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장례의 예를 다하였다. 안타깝게도 정엄은 슬픔이 지나쳐 병을 얻어 1580년 자신도 숨을 거두고 말았다.

1611년 나라에서는 이러한 공을 인정하여 사헌부 대사헌에 증직(贈職)하고, 양림동에 효자 광주 정공엄지려를 세워 주었다. 현재의 정려는 1975년 후손들이 석조(石造)로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정려 앞에 세워진 충견상은 정엄이 기르던 충성스러운 개를 기리는 것이다.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의 개는 정엄의 서신(편지)을 목에 걸고 한양과 평양 등 각 감영에 문서 심부름을 하였다고 한다. 한양으로 심부름을 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전주의 강가 다리 밑에서 새끼 9마리를 낳고, 주인이 살고 있던 이곳까지 새끼를 나른 후 탈진해 생을 마감하였다고 한다. 정엄은 충성심이 깊고 모성애 강한 자신 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석상을 세웠는데 그 석상을 ‘개의 비석’이라 부르다 ‘개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개와 인간과의 반려 삶에 관한 스토리를 문화콘텐츠로 형상화한 이야기와 조형물을 만날 수 있었다. 개비 설화 속 개비의 새끼 9마리 중 마지막 강아지가 호랑가시나무 요정들의 도움으로 시간의 문을 통과해 400년 후의 우체부 할아버지 손에 자라게 되고 지금의 편지를 배달하는 현재 ‘동개비’로 재탄생하였다는 스토리텔링으로 문화콘텐츠를 만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충견에 관한 설명의 부재로 그 충견을 쉽게 만날 수 없는 아쉬움을 남기며 양림동을 떠났다.

※외부 칼럼·기고·독자투고 내용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효자 광주 정공엄지려(孝子光州鄭公淹之閭)와 충견상(忠犬像).
동행(작가: 윤선종, 동행인: 이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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