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니가 좀 불안하다. 꼭 전등불에 엉겨드는 부나방 같애. 뜨겁게 꼬실라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불빛에 덤벼드는 부나방 말이야.”

이기반의 지나온 얘기를 듣고 하성구가 걱정했다. 밤늦게 하성구 하숙집을 찾은 이기반은 동네슈퍼에서 사들고 온 소주병과 오징어포를 방바닥에 놓았다.

“싱거운 놈.”

하성구는 이기반이 때로 돈키호테 같은 행동을 하는 것 같아서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그는 이기반의 수배를 알지 못했다. 그러니 그가 왜 쫓기고, 숨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성구와 이기반은 고교 동창생이고, 과는 다르지만 연희동의 같은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너는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나선다고 하지만, 뿌리없는 수초 같애. 비현실적이야. 그보다 나라 발전을 모색하는 편이 낫지 않겠냐. 나는 고향의 낙후를 보고, 어떻게 하면 면할 수 있나를 생각하고 있다.”

하성구가 말하자, 사업가를 지망하는 학생의 생각이라고 이기반은 가볍게 치부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주화가 아닌가. 고향 선배인 김지하씨도 광야에서 외치지 않았던가. 이기반은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를 자신의 삶과 정신의 지향으로 잡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자가 바로 자신이라고 등치시켰다.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국 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서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타는 목마름으로’의 일부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대학생과 지식인, 민중들에게 투쟁의 바이블이 된 시. 1970년대 민주주의 운동에 각종 탄압이 들어오고, 양심적 인사들의 체포와 구금과 고문이 자행되던 시기, 박정희가 삼선개헌에 이어 유신헌법을 발표한 암울한 시기에 울리는 투쟁의 북소리…, 암담한 현실에 절규하고, 폭력적이고 반민주주의적인 사회현실이 짓눌러올수록 그는 늘 경전처럼 이 시를 가슴에 품고 다녔다.

그런데 하성구는 다른 거리에 서있다. 하성구가 물었다.

“왜 우리 지역이 낙후되고 있냐?”

이기반이 생각한 나머지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정치 잘못 때문이지. 그건 민주화하고도 직결되어 있어.”

“민주화하고는 상관 없어. 민주주의는 모든 걸 갖다 붙이는 부적같은 것일 뿐이야. 현실을 잘 파악해.”

하성구는 현실적으로 국가 제도와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손질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가 볼 때, 심각한 지역 불균형의 원인은 지역별 발전 격차를 무시한 국가제도와 시스템의 잘못에서 기인한다. 시스템의 잘못은 단순히 국가 지도자의 편향된 사고에서 나온다. 그것이 민주주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가 하면 하는 것이고, 하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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