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여성분을 이쪽으로 보낼라고 하는디, 받아줄랑가요?”

갑작스런 말에 이기반이 놀랐다.

“여성분을 보낸다니, 무슨 말이냐.”

이기호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래도 이해가 안되는지 이기반이 물었다.

“이곳 은신처가 여기저기 알려지면 곤란하다. 문제되는 사람들이 한군데 있으면 절대적으로 위험하다는 거 모르나. 여기 더 이상 있을 수가 없구만. 나는 떠나겠습니다.”

이기반이 도노반 신부를 향해 말했다. 도노반 신부가 무겁게 고개를 젓는데 이기반이 다시 힘주어 다시 말했다.

“신부님, 저는 어차피 떠나기로 했습니다. 더 이상 신세지고 싶지 않습니다. 이곳이 너무 지루합니다. 이렇게 무의미하게 숨어있는 것이 세상 살아가는 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때가 아니여. 이기반 학생 아버지도 사건에 연루되어서 고상하지 않았는가. 지금 나설 때가 아니란마시, 상황을 살펴봐야 하는 것이여.”

이기반의 아버지가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것은 임자도 간첩단 사건에 김한범이 엮어들어간 것과 관련된 것을 말한다. 김한범이 묵었던 곳은 어느곳이라도 샅샅이 뒤졌다. 사건을 만들려고 하면 모든 것이 혐의가 있고, 안만들려고 하면 짙은 혐의도 스쳐지나간다. 이기반이 도노반 신부의 말을 묵살하고 벽장에서 옷을 꺼내 챙겼다. 쌓아서 차곡차곡 담으니 한 트렁크가 되었다.

“어디로 가려고 하십니까.”

전성준이 물었다.

“정처는 없습니다. 그리고 묻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구요.”

그러나 그는 서울로 올라갈 작정이었다.

“절로 들어가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해남 두륜산에는 암자들이 많습니다. 그곳에 박혀있다 시절이 좋아지면 나오세요. 그 기간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계속 은둔자의 길을 걸으라는 말에 이기반은 반감이 생겼다.

“갈수록 길은 험하고, 정치는 악화되고 있는데, 세월이 좋아지다니요. 이곳은 제가 있을 곳이 못됩니다. 대신 여성분의 은신처로 제공하십시오. 여성분의 남자는 저도 잘 아는 친구입니다.”

“남자 친구 때문이 아니라 여성분의 아버지 때문에 쫓긴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 반체제 인사들이 일본에서 암약을 하고 있고, 일부는 본국으로 스며들어오고, 그래서 본국 끄나풀들을 척결하고자 사람들을 풀었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기반은 그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은신처를 나섰다.

서울에 당도한 것은 밤이었다. 그는 하숙집으로 갈까 망설이다가 하성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의 집으로 갈까?”

“왜 니네 하숙집으로 가지 않고.”

“이미 그 집에서 나와서 지금 마땅히 갈 곳이 없다.”

하성구는 시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거리에 있는 대학생이었다. 한때는 시국에 대해 열변을 토하더니 지금은 이공학도로서 어떻게 하면 높은 점수를 따 사회에 나가 좋은 회사에 입사하거나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을까 하며 걱정없이 사는 청년이었다. 그렇다고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염전 사업이 너무 로스가 많이 나는 것이다. 기껏 많은 수확을 했다고 해도 주판을 두드려보면 적자를 면하는 수준이었다. 얼핏 보면 풍작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정작 남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로부터 목포에 한번 내려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전화를 통해 “아무래도 염전 아이들이 장난을 하는 것같다. 마산 아지노모도 공장으로 소금을 한 배씩 실어보내는디 중간에서 누가 장난질을 하는지 제대로 수금이 안된다마다” 하고 걱정을 하였다. 그래서 한번 내려와 동태를 살펴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하성구는 이래저래 목포 소식을 알까 싶어서 이기반에게 말했다.

“그래, 집으로 들어와라. 내가 살고 있는 집 알고 있냐?”

“신촌 아니냐.”

“이사했다. 연희동 풍차집으로 와서 전화해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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