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를 알려고도 않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다분히 의도된 행동으로 보였다. 이건 틀림없이 강대판이 노린 수작이다. 자리를 비키면서 똘마니들을 시켜 일종의 보복을 가한다. 이노무 새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니 캥기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 자신 떳떳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범죄를 묵인해주는 대가로 성 상납은 물론 온갖 밀수품 현물과 현금 상납도 받은 것이다.

강대판은 김구택을 찾았다.

“최정선 형수님을 내보내라. 여기서는 안되겠다.”

“무슨 일입니까, 형님.”

“정보원들이 냄새를 맡았다.”

“그럴 리가요. 꼭꼭 숨겨놨는디 눈치챘을랍디여.”

“그랑깨 요원들이제. 꼬투리만 있으면 잡아엮는다마다.”

“난감하네.”

“난감할 것은 못되아. 산정동성당 도노반 신부 있지 않냐. 거기는 숨을 곳이 두 군데여. 성골롬반 병원도 있승깨, 그리로 피난시켜라.”

“더 불섶에 뛰어든 거 아닐게라우?”

“그 방법 밖에는 없어. 나가 아는 분이 그분잉깨.”

그 시간 이기반과 도노반 신부, 전성준이 이기반의 골방에 앉아있었다. 이기반이 상경 의사를 비쳤기 때문에 두 사람이 찾아왔다.

“여기 죽치고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시간이 하세월이 되어서요. 권력이 뭔가를 꾸미는 것 같은데, 침묵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태풍 전의 고요랄까, 이런 때 올라가야죠.”

“때가 아녀. 이번에는 학생간첩단 사건을 조작한단 말이 들리고, 그래서 발호할 기회를 준다는 것이여. 불처럼 번지면 한꺼번에 싹 꺼버리는 작정이락 안하는가.”

도노반 신부였다.

“계속 이용당할 수 없습니다. 정권은 자꾸만 사회와 우리를 분열시키고 있습니다. 흑백논리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빨갱이라고 몰아붙여요. 독재자나 그 하수인들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흑백논리에 휘둘리는 세상이 세상입니까. 그리고 툭하면 물정 모르는 어렸을 적 일을 가지고 간첩몰이하고, 그래서 너는 죽어야 한다는 식으로 몰아붙입니다.”

이기반은 어렸을 적 숙부 집에서 머슴살이하던 김한범이 억울하게 죽은 사건을 알고 있었다. 자살했다고 했지만 고문 치사를 그렇게 위장 발표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고리로 그를 찾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서울에서의 시위주동 혐의로 추적을 받고 있자, 이번에는 더 큰 혐의를 씌워 그를 쫓고 있는 것이다.

조용히 앉아있던 전성준이 말했다.

“여기 오면 해결책은 없고, 비현실적인 얘기만 나오는군요,”

이기반이 받았다.

“우리 아버지가 당한 것이 왜 비현실적입니까. 김한범 씨가 머슴살이하면서 간첩질한 것을 왜 묵인했느냐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것도 십수년 전의 일인데. 마을 아이들이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배운 것을 묵인했다면서 아버지를 모처로 연행해 뺨을 때렸다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간첩 혐의를 씌워 이기반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다는 것을 그 자신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이기호에게 들은 얘기는 대충 이러했다.

그의 아버지가 한 밤중에 연행되어 갔는데, 수사관이 느닷없이 김한범이 북한으로부터 받았다는 지령 내용들을 열거했다. 지하당 조직을 결성할 것. 반체제 서클을 조직하는데 이 고장 출신 서울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할 것, 그들 중에서 공작 조직의 간부를 양성할 것, 김대중이 선동하는 단체를 지원할 것, 지하당은 장차 유격대로 발전시키고 이에 대비하여 도서 지역에 유격기지를 정할 것, 출판사를 경영하되 장기적인 안목으로 반공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반미·반정부 사상을 고취시킬 것을 모의하자 이기반이 그대로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는 모두 이기반을 때려잡기 위한 절차였다. 아버지와 아들을 이간질하고, 동네 사람들과 이기반 집안의 틈을 벌여놓는 작업이었다. 죽은 김한범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들이 이렇게 구성되고 있었다.

“이런 것들이 비현실적입니까. 조작팀이 구성하는대로 시나리오가 짜여져가고 있는데 말이죠.”

그때 이기호가 방으로 소리없이 들어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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