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자(동화작가)

 

이성자 동화작가

마지막 한 장 남은 달력을 바라보니 갑자기 허전함이 밀려왔다. 가까운 친구 K에게 점심이나 같이 하자고 연락하니 기다렸다는 듯 달려 나왔다. 우리는 가까운 추어탕 집에 마주앉아 점심을 함께 하게 되었다. 그녀는 만나서부터 헤어질 때까지 줄곧 자신의 이야기를 했고, 자신과 친했던 친구의 험담까지 민망할 정도로 늘어놓았다. 며칠 사이에 달라져버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래도 끝까지 들어주었다. 두 시간 정도 알맹이가 없는 이야기를 듣다보니, 내 인내심의 한계가 느껴질 정도였다.

실은 나도 가슴에 쌓아 둔 이야기를 시원하게 풀어놓고 싶어서 친구인 그녀를 불러낸 것인데, 한마디도 못 하고 그녀의 말만 듣고 돌아온 셈이다. 두 시간 동안이나 할 이야기 못할 이야기 다 늘어놓고, 이제야 살 것 같다며 돌아서던 그녀를 떠올리며 야속한 생각까지 들었던 터이다. 휴대전화에 저장해 둔 사진첩을 열고 그녀 얼굴을 들여다보며, “너, 진짜 웃긴다. 뭐가 부족해서 그러는 거야?” 원망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리다가 혼자서 웃고 말았다.

문득 레바논 태생의 소설가이며 시인, 철학자인 칼릴지브란이 생각났다. 그는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 너의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고 했다. 과연 내가 일방적으로 그녀를 원망할 수 있을까. 그동안 나도 무심결에 말을 많이 해서 상대방을 지루하고 서운하게 하지는 않았을까, 더 나아가 잘못 전한 말로 원망의 적을 만들지는 않았을까? 자연스레 내가 살아왔던 지난 일 년을 돌아보게 되었다.

분명 나이가 들면서 말이 많아진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살아오는 동안 힘들고 억울한 일들이 더러 있었다. 아니, 가끔은 누구에겐가 내 속마음을 털어놓고 위로 받고 싶었다. 그런데도 직업상 상대방 말을 끝까지 들어주기만 했던 것 같다. 혹여 상대방이 어떤 곤란한 말을 물어왔을 때도 화를 내기보다는 즉답을 피하며 자존심을 지키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는 입이 근질거려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했던 기억이 난다. 어디라도 불쑥불쑥 끼어들기도 했다. 나잇값을 해야 할텐데, 도대체 참을성이 없어진 것일까.

며칠 후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얼른 선약이 있으니 다음에 만나자며 전화를 끊으려는데, 그녀가 병원에서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고 전했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자식의 방황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며 이제야 눈물 나는 진심을 털어놓았다. 지난 번 그녀를 만났을 때 갑자기 말이 많아진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코로나19의 긴 터널을 지나오면서 너나없이 힘들고 지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잠시나마 그녀의 일방적 대화를 원망했던 게 미안해서 당장 점심 같이 하자며 전화를 끊고 서둘러 만나러 나갔다.

앞으로 이십 여일 지나면 2023년의 토끼가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난다. 언제나 그렇듯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길목에서 이런저런 모임이 잦을 것이다. 오랜만에 만나니 하고 싶은 말도 많고, 자랑할 일도 많을 것이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올 연말만큼은 상대의 가슴에 켜켜이 쌓인 말들을 털어놓도록 시간을 배려해주면 어떨까. 솔직히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입은 적을 만들고, 귀는 친구를 만든다”는 탈무드의 교훈을 새기며 초연함과 경청할 수 있는 절제력을 갖는 의연한 연말을 보내도록 노력해보자.

그리하여 솟아오르는 2024년 푸른 용의 해를 힘차게 맞이하자. 용은 예로부터 물의 신이자 풍요의 신으로 여겨졌고, 더 나아가 왕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기도 했다. 우리도 스스로의 잠재력을 굳게 믿고 원하는 것을 이루는 최고의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지난 시간의 아픔은 훌훌 떨쳐버리고, 용의 힘찬 기운아래 강한 힘과 용기를 얻어 어려움을 극복하고 모두가 성공과 행복, 풍요로움을 이루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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