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정을 사랑의 포로로 잡아 조선을 품에 넣은 여인

 

 

최혁 주필의 전라도 역사이야기

22. 조선을 요리했던 나주 여인 나합(羅閤)

영의정을 사랑의 포로로 잡아 조선을 품에 넣은 여인

영산포 택촌 출신…미모, 기예 뛰어나 영의정 애첩으로 신분상승

가뭄에 고향사람 고통 받자 김좌근 움직여 나주에 구휼미 풀기도

나합흔적은 금성관내 김좌근선정비·영산강변 도내기샘에 남아있어

전남 나주 영산포 삼영동에서 태어난 양씨성의 여자아이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여자아이는 춤과 소리를 배워 기녀가 됐다. 그러다 조선말에 영의정을 세 번이나 지낸 김좌근(金左根)의 눈에 띄어 한양으로 올라가 애첩이 됐다. 양씨녀는 김좌근의 위세를 빌려 권력을 휘둘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나주에서 올라온 높은 벼슬아치’라 빗대 ‘나합’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나합은 전국에 흉년이 들었을 때 김좌근을 졸라 나주에 구휼미를 풀도록 했다. 나합의 흔적은 영산강변 택촌의 도내기 샘과 금성관내에 있는 김좌근선정비에 남아있다.

■아름다웠던 영산포 양씨 처녀

경국지색(傾國之色). 나라를 기울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을 일컫는 말이다. 나라를 기울게 할 정도면 어디 외모만 예뻤겠는가? 모든 것이 남자를 홀릴(?)정도로 대단했을 것이다. 아름다운 미모와 재치로 나라를 농단한 여인은 나주에도 있었다. 조선말에 영의정을 세 번이나 지낸 김좌근(金左根)을 사랑의 포로로 잡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나주 출신 여인 나합(羅閤)이 그 주인공이다.

나합은 이름이 아니다. 나주(羅州) 출신 합하(閤下)가 합쳐진 말이다. 대개 정2품의 고관을 ‘대감’이라 불렀다 한다. 정1품 고관은 합하라는 칭호를 붙였다. 말 그대로라면 나합은 나주 출신의 대단히 높은 벼슬아치를 뜻한다.

그러나 나합은 기생이었다. 영산포 삼영동에서 태어났다. 성씨는 양씨라 하는데 확실치는 않다. 나합의 미모는 남달랐다. 어찌나 예쁘던지 어린 나합이 지나가면 사람들은 넋을 놓고 쳐다보았다. 그녀의 집은 영산마을 건너 어장촌(漁場村) 근처에 있었다. 어장촌은 영산강과 연결돼 있던 포구 마을이다. 나합은 처녀시절 도내기샘에서 물을 긷고 살림살이를 씻었다. 그녀를 본 남자들은 으레 상사병에 걸렸다.

나주 영산포 일대에서 불러지던 “나주 영산 도내기샘에 상추 씻는 저 큰 애기, 속잎일랑 네가 먹고, 겉잎일랑 활활 씻어 나를 주소”라는 민요는 나합을 주인공으로 한 것이다. 아름다운 여인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남정네들의 욕망이 담겨 있다. 상추의 잎을 속옷과 겉옷으로 비유하고 먹는 것을 정사(情事)로 은유한, 이중어의(二重語義)적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辭)라 할 수 있다.

■영의정의 애첩이 된 기생 양씨

영산포에서 태어난 양씨 성의 어린 여자아이는 기생이 돼 춤과 노래를 몸에 익힌다. 아름다운 미모에 춤과 소리 또한 뛰어나니 그녀를 본 남자들은 애간장이 녹았다고 한다.

그때 마침 영의정이었던 김좌근이 나주에 내려왔다가 그녀를 보게 된다. 한눈에 반한 김좌근은 한양으로 그녀를 데려가 첩을 삼았다. 김좌근은 1797년(정조 21)에 태어나 1869년(고종 6)에 죽은 조선후기의 권신이다. 아버지는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이며 누이가 순조 비 순원왕후(純元王后)다. 김좌근은 1853년부터 10년 동안 순조, 헌종, 철종 임금 밑에서 영의정을 세 번이나 지냈다.

양씨녀는 앞에서 말한 대로 김좌근의 총애를 받은 뒤 나합이 된다. 나주 출신 기생이었지만 워낙 세도가 당당해 주위 사람들은 그녀를 합부인이라 불렀다고 한다. 정1품의 고관들을 칭하는 합하가 그녀에게 주어진 것이다. 고향이 나주인 합부인은 줄임말로 나합이 된다. 합(閤)은 대궐을 가리키기도 하고 양반집 대문 양쪽의 늘어서 있는 작은 문간방을 뜻하기도 한다.

합부인이 된 나주 나합은 김좌근의 권세를 자신의 힘으로 사용했다. 지방수령의 임명을 좌지우지했다. 나합은 갈수록 기고만장해졌던 모양이다. 대청에 앉아 한양을 내려다보고 싶다며 시야를 가리고 있는 아래채와 집 앞의 민가들을 허물어줄 것을 요청했다. 나합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 김좌근은 아래채의 네 기둥을 조금씩 잘라내 낮게 만들었다. 또 풍경을 가리고 있는 집 앞쪽의 민가 몇 채를 사들여 허물었다. 나합의 위세가 그대로 드러난 예다.

■재치로 위기를 모면한 나합

나합은 재치도 있었던 것 같다. 하루는 김좌근이 집에 돌아와 나합을 채근했다.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나합이라 하는데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나합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세상 남자들이 여자를 희롱할 때 합(蛤·대합조개)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를 ‘나주에서 온 합’이라 해 나합이라 부르는 모양입니다”

김좌근의 노한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자신을 한껏 낮춘 것이다. 여자일 뿐 다른 욕심이 없다는 말로 김좌근의 염려를 없앤 것이다.

나합은 자신을 낮춰서 ‘조개’라 했지만, 사실 조개는 일부일처의 상징이기도 하다. 예전부터 조개라는 단어가 여성들을 성적으로 비하하는 좋지 않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만 조개는 조가비가 같은 짝이어야만 빈틈이 없이 꽉 맞기에 다른 짝을 넘보지 않는 생물로 비유된다. 조가비는 서로 다른 조가비를 짝으로 해 물려보면 아귀가 맞지 않고 틀어진다. 나합은 자신이 말한 대로 중년 이후에는 김좌근만 섬기면서 잘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김좌근 선정비가 금성관에 있는 까닭은

나합이 김좌근의 애첩이었다는 흔적은 나주 금성관 내에 세워져 있는 김좌근 선정비에서 찾을 수 있다. 나합은 전국에 흉년이 들었을 때 김좌근을 졸라 나주에 구휼미를 풀도록 했다고 한다. 나주 사람들은 그 공에 보답하기 위해 김좌근의 선정을 기리는 비를 나주관아 안에 세웠다.

영의정김공좌근영세불망비(領議政金公左根永世不忘碑)라고 새겨진 비는 지금 금성관 내에서 볼 수 있다. 전국적으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김좌근을 기리는 비이다. 김좌근 선정비는 철종 11년인 1860년 나주성 동문 안쪽에 세워졌다. 나중에 백성들이 이를 부숴버렸다. 두 동강 난 채로 버려져 있었으나 다시 세워져 1987년에 금성관 안으로 옮겨졌다.

지금은 문화유적지 조사 관계로 금성관 입구 쪽으로 잠시 옮겨진 상태다. 권세가들의 학정을 없애고 새 세상을 열기 위해 일어섰던 동학농민군들을 토벌했던 금성토평비가 곁에 세워져 있어 시선을 끈다. 조선 후기의 얽히고설킨 역사적 사건들과 시대상을 음미해볼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택촌마을 입구의 도내기샘
나합은 비록 기생 출신이었지만 당대 최고 권력자의 애첩으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으니 그녀 또한 난세가 낳은 풍운녀라 할 수 있다. 나합의 자취는 영산동에 있는 도내기샘에 남아있다. 나합이 처녀시절 물을 긷기 위해 오가면서 젊은 남자들을 애태우게 했다는 도내기샘은 영산포 택촌마을에 있다.

 

 

수돗물이 공급되면서 도내기 샘은 30여년째 사용되지 않고 있다. 택촌마을 아주머니가 도내기 샘에 얽혀 있는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도내기샘 안내문
금성관 내부모습
금성관내에 있는 영의정김공좌근영세불망비
영산창이 있던 곳을 기념해 세운 비
광여도에 나타나있는 나주목(영산창)
금성관내 비석
김좌근 선정비앞의 필자
영산포에서 바라본 영강동
택촌마을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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