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밭담·구들장 논·우실 … 문화유산에 등록
자연환경 적응하려는 삶의 지혜 ‘그대로’
밭담, 백성들 사이 갈등 해결 차원서 착안
구들장 논, 관개농업시스템 보존가치 인정

#‘취석축원(聚石築垣)’으로 백성 고통 해결

섬 사람들은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삐뚤빼뚤한 돌을 쌓아 담을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담장은 일정한 크기의 돌을 쌓고, 그 위에 짚과 흙을 섞어 올린 다음 다시 그 위에 돌을 올려 층위를 이룬다. 짚과 흙이 접착제 구실을 하여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반면 섬마을 담장은 짱돌과 작은 돌, 둥근 돌과 모난 돌 등 막돌을 쌓고, 틈새는 세모 네모 모양의 적당한 돌을 찾아 끼워 넣었다. 이렇듯 돌을 주재료로 쌓은 섬마을 담장은 쉽게 무너질 것처럼 허술하지만, 그 기능은 막강하다. 안과 밖, 이 곳과 저 곳의 경계를 가름해주기 때문이다.

제주도 무덤가 돌담 모습.

기록에 의하면, 제주도 밭담은 1234년(고려 고종 21) 제주 판관 김구(1211~1278)의 민원 해결책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제주 돌문화공원에 서 있는 김구의 공적비에 따르면, 밭의 경계가 모호하여 백성들 간의 갈등이 생기고, 방목하던 말과 소가 밭작물을 헤쳐 밭주인이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이러한 백성들의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제주 판관 김구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착안하였다. 바로 ‘취석축원(聚石築垣)’이다. 즉 돌을 모아 담을 쌓고 경계를 만드니 주민이 편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렇듯 제주 밭담은 숭숭 구멍이 나 있어 금세 쓰러질 듯 보이지만 사생활과 공동영역을 구분 짓는 기능을 수행해오고 있다. 2006년 문화재청은 제주도 설촌마을 밭담과 돌담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완도군 청산도 상서리 돌담길.

#구들장으로 논을 만든 청산도 사람들

전통시대 토지는 육지 사람들을 섬으로 불러들이는 원동력이었다. 내륙지역 땅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새로운 공간을 찾아 섬으로 이동했다. 섬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폐목장을 개간하거나, 바닷가에 제방을 쌓아 간척지를 만들었으며, 산기슭에 구들장을 놓아 논을 만들었다. 이 가운데 단연 으뜸은 청산도 사람들이 만든 구들장 논이다.

1681년(숙종 7)에 병조판서 민유중이 이르기를, “청산도는 토지가 비옥하고 백성이 많아서 통제사 이순신과 명나라 진린이 군사들과 함께 주둔했던 곳입니다. 청산도에 수군만호를 파견하고, 섬사람들은 선박을 부리는 능노군과 활 쏘는 사포수로 충당한다면 연해의 방비가 착실해질 겁니다. 이로써 조정에서 섬에 수군을 파견하는 폐단이 없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기사에서 보듯, 17세기 말엽 청산도에 토지가 많았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청산도의 전답은 어디에 어떤 형태로 분포하였을까? 영화 서편제 촬영장이 있는 당리와 그 너머에 입지한 읍리에는 섬의 행정과 해양방어의 중심지였다. 즉 당리에 설치된 청산도 수군진은 서남해역을 방어하는 전진기지였고, 읍리는 청산도 인근 부속도서의 행정 전반을 관장하였던 치소(治所)였다. 이러한 당리와 읍리에 문전옥답이 분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나머지 청산도 전역에 구들장 논이 분포한 것으로 확인된다.

구들장보존협의회에 따르면, 현전하는 구들장 논은 청산도 지리(2), 도청리(5), 권덕리(1), 청계리(4), 상서리(27), 양지리(21), 부흥리(28), 그리고 부속도서인 대모도 모동과 서리에 19개소 등이 분포한다고 한다. 청산도 구들장 논의 특성은 산꼭대기에서 흘러내려오는 깨끗한 물을 한 방울도 버리지 않고, 아랫논까지 나눠 사용하는 관개농업시스템의 보존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농림축산식품부의 국가중요농업유산 1호로 지정되었으며, 2014년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가 세계중요농업유산(GIAHS)으로 등재하였다.

 

 

신안 비금도 서산리 ‘우실’.

 

#섬마을 울타리 ‘우실’

섬은 바람이 많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海風)은 섬사람들의 생업공간을 위협하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바람을 마중하기 위해 돌이나 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었다. 일례로 신안 비금도 내촌 사람들은 새해가 열리면 가가호호 한사람씩 마을 울력에 참여한다. 그것은 마을로 불어오는 해풍을 마중하기 위해 뒷산 계곡에 돌로 담을 쌓는 일에 동원되었다. 이 돌담을 ‘우실’이라 부른다.

우실은 지역에 따라 ‘우술’, ‘우슬’, ‘돌담’ 등으로 칭하고, 혹은 돌 대신 수목으로 조성될 경우 ‘당산’, ‘방풍림’, ‘노거수림’, ‘어부림’ 등으로 불렀다. 이러한 우실의 규모는 마을을 감싸 안을 만큼, 혹은 마을 뒷산 계곡을 가로지를 만큼 그 길이가 장대하고, 그 높이는 어른 키를 훌쩍 넘을 만큼 높다. 그 형태는 전통 성곽의 옹성을 닮았는데, 안담과 바깥담이 서로 엇갈리게 축조되어 외부에서 마을을 바라보면 안쪽을 들여다볼 수 없다.

그러나 섬사람들에게 우실은 열린 공간이다. 즉 마을 안에서 바깥에 있는 바다로 나가는 통로가 우실 중간에 열려있기 때문이다. 2006년 문화재청은 섬마을에 전해오는 돌담을 국가등록문화재로 인정하였는데, 신안 흑산도 사리마을과 비금도 내촌마을의 돌담이 등록되었다.

이렇듯 섬마을에 전승되고 있는 돌문화는 골목길의 돌담, 밭의 경계를 구분 짓는 밭담, 산록에 조성된 구들장 논, 마을 뒷산에서 불러오는 해풍을 마중하는 우실 등 섬의 자연환경에 어우러진 선조들의 삶의 지혜를 전해주는 문화유산이다.

글·사진/김경옥(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교수)

정리/김우관 기자 kwg@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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