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도 고등어 파시 황금어장…주민들엔 ‘그림의 떡’
고등어 호황 배 한 척당 30만~50만 마리 어획
일본인 선주에 고용된 한국인 대부분 ‘빈 강정’
해방 뒤 우리 어민 품으로…파시문화거리 조성
‘아픈 역사’ 파시, 서편제 촬영지에 가려 외면

 

일제 강점기 전남을 대표했던 고등어 황금어장 완도 파시의 중심지인 청산도. 지금은 영화 서편제 촬영지와 ‘슬로우 길’이 조성돼 관광객들이 끊임없이 방문하는 곳이다.

섬 답사를 다니다 보면, 주민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 중 하나는 ‘파시(波市)’에 대한 기억이다. 파시는 직역하면 ‘파도 위의 시장’이다. 실제는 물결을 따라 해상을 이동하며, 물고기를 사고파는 시장을 뜻한다. 어기(漁期)에 따라 섬이나 해안가에 형성되는 임시 시장을 통칭하는 의미로 사용되어왔다. 파시에서는 어획물의 매매가 진행되고, 어민과 상인들을 고객으로 하는 음식점·숙박시설·위락시설·상점·선구상(船具商) 등이 함께 형성된다.

파시는 우리 민족의 어로 활동과 관련된 해양 문화유산이다. 섬사람들에게는 가장 살기 좋았던 어업의 전성시대를 상징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파시 문화에는 일제 어업침탈의 역사가 담겨 있다. 파시는 전통 시대부터 존재했던 것이지만 지금 섬 어민들이 기억하는 내용은 주로 근현대 시기에 해당한다. 일제강점기 근대어선과 어법의 발달로 수확량이 늘어나면서 파시가 열리는 어장도 크게 확대되었다. 그런데 그 주인은 따로 있었고, 파시의 성장 이면에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아픈 역사가 존재했다.

대표 사례 중 하나가 청산도의 고등어 파시이다. 청산도는 현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면의 본섬이다. 영화 서편제 촬영지와 전통 농법인 구들장 논으로 유명하다. 지난 2007년에 슬로우시티로 지정된 이후 걷기 좋은 ‘청산도 슬로우 길’이 조성되면서 관광 명소가 되었다. 청산도는 일제강점기 전남을 대표하는 황금어장이었다. 특히 고등어 어업이 활발했고, 그에 따른 ‘파시’ 문화가 형성되었던 곳이다.

1917년 목포신보사에서 발간한 ‘전남사진지’에는 “5~6월 성어기 때는 한일 어선 700~800척이 모여들어 약10만원의 어획고를 올린다. 육상에는 잡화상·요리점들이 임시 개업하여 북새통을 이뤄 번성하는 항구가 된다. 본섬은 영광군 위도의 조기잡이, 여수 나로도의 갯장어어업과 함께 전남 3대 어장으로 이름나 있다.”고 소개되어 있다. 청산도 고등어 어업의 상황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당시 신문 기사에도 유사한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1938년 동아일보 4월 15일 기사에는 청산도가 ‘조선의 대어장’으로 기록되어 있다. 청산도는 한마디로 ‘고등어의 섬’이라는 이미지를 형성했다. 1928년 8월 8일 동아일보 기사에는 따르면, 어선 배 한 척에 30만~50만 마리를 어획했고, 수송선이 고등어의 무게를 못 이겨 일부러 바다에 다시 고등어로 버리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 엄청난 고등어가 주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1928년 8월 8일 동아일보 ‘도서순례’ 연재에 실린 기사에 “태산같이 쌓인 생선, 섬사람엔 화중지병(畵中之餠)”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곳곳에 보이는 것이 고등어, 흔한 것도 값싼 것도 고등어인데, 그 많은 고등어잡이가 이곳 사람들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음을 비판했다. 정작 섬 주민들은 어선 한 척 마련할 자금이 없었기 때문에 고등어 호황은 일본인들을 위한 놀음이었다. 한국인들은 대부분 일본인 선주가 고용한 선원으로 일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전남의 주요 어장을 일본 어민들이 장악해갔고, 점점 기업화되었다. 반면 영세한 한국인들의 어업 활동은 경쟁이 되지 못했다. 심지어 일본 어민들은 청산도 고등어 어업에 비행기까지 동원했다. 고등어 떼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비행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39년 광주 비행장이 개장한 후 비행기의 활용성이 높아졌다. 항공에서 비행기가 고등어 떼를 발견하면 바로 어선에 무전을 보내는 방식이었다. 특히 고등어 어기가 되었는데 잘 잡히지 않을 때 비행기를 출동시켰다. 비행기를 이용할 만큼 청산도 주변 남도의 해역이 수익성이 큰 어장이었음을 보여준다.

바다에서 잡힌 고등어는 대부분 일본으로 곧바로 보내지고 남는 고등어들이 배에 실려 청산도 도청항으로 들어왔다. 고등어 어업 초기에는 주로 부산으로 보내졌다가, 이후 관련 시설들이 발달하면서 곧바로 시모노세키 등 일본으로 수송되는 양상이었다.

이렇다 보니 청산도에 고등어가 그렇게 많이 잡혔는데도 정작 일제강점기 청산도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가야 했다. 1928년 8월 8일 동아일보에는 “이곳 청년 200여 명은 멀리 일본으로 돈벌이를 떠나”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청산도에 고등어 어업이 호황이었지만, 청산도의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아 고향 섬을 떠나야 하는 현실이었다. 한국인들은 일본으로 보내진 고등어 외에 남은 고등어를 사서 염장 보관해 둔 후 다른 포구에 내다 파는 전통적인 방식의 영세한 상업행위가 유지되는 수준이었다. 물론 식민치하 열악한 환경에서도 섬 주민들의 전통문화가 전승되어 왔다는 면에서는 그 자체도 의미가 있다.

완도 청산도 관문인 도청 마을에 세워진 ‘청산 파시문화거리’ 안내문. 청산도 슬로길 11번 코스에 있다.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파시가 성행했음을 소개하고 있다.

해방 이후 일본인이 떠나고 황금어장이 우리 어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비로소 청산도 주민들이 고등어 파시의 주인공이 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고등어 호황이 한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에 청산도 어민들은 고등어 파시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이를 기념화하기 위해 청산도의 관문인 도청마을에 ‘파시문화거리’를 조성하기도 했다. 청산도 슬로길 11번 코스에 해당한다. 전남에서는 가장 먼저 ‘파시’를 주제로 관광 자원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 대부분의 청산도 관광객들은 파시문화거리에 별 관심이 없다. 영화 서편제 촬영지가 주 방문목적이기 때문에 청산도 고등어 파시의 역사에는 특별한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도청항 청산 파시문화거리 안내문에는 1930년대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청산 파시가 번성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파시는 섬 문화를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흔히 파시를 한국해양문화의 상징이라고 하는데, 그 기억과 의미 부여에는 시대구분이 필요하다.

일제강점기의 파시는 황금어장에 대한 침탈의 역사이고, 해방 이후는 섬사람들의 전성시대에 대한 문화적 기억이다. 파시 문화에 대한 관심이 더 증가하기를 바라며, 우리 바다를 지키지 못했을 때의 아픔을 기억하는 역사성도 함께 논의되기를 기대한다.

글·사진/최성환(목포대 사학과·도서문화연구원 교수)

정리/김우관 기자 kwg@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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