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풍어’ 기원하는 어선 깃발… 백미는 ‘대어기’
한국, 일본이 갖는 ‘풍어·대어’ 관념에서 비롯
같으면서 다르지만 ‘큰 고기’에 대한 소망 담아
“어획물 가치 결정 요소, 결국 크기” 때문 유지

 

목포항에 뱃기를 단 어선들이 섣달 그믐 뱃고사를 지내기 위해 모여든 모습.

서해안과 남해안의 바다의례에서는 다양한 깃발의 향연이 펼쳐진다. 특히 어선어업이 발달한 곳에서는 마을공동체의 당제 기간에 배에서 보관하던 깃발들을 모두 꺼내 이물(선수)과 고물(선미)에 꽂고 뱃고사를 지낸다.

지역마다 뱃기의 종류는 조금씩 다르지만 종합해보면 오색기(五色旗), 대어기(大漁旗), 상자기(上旗), 선주기(船主旗), 장군기(將軍旗), 봉기(奉旗), 호기(虎旗), 태극기(太極旗) 등이 존재한다. 뱃기 중에서 전통적이면서 일반적인 깃발은 오색기와 상자기다. 오색기는 黑·靑·黃·紅·白 다섯 가지 색깔의 천을 붙여서 만든 형태이고, 상자기는 한자로 上자를 오려붙이거나 써서 매단 형태다.
 

흑산도 홍어잡이배 영진호의 뱃기.

서해안에서는 상자기와 오색기를 별도로 제작하고, 동해안에서는 오색기만 제작하여 당제나 뱃고사, 진수식, 만선 때 배의 안전 항해와 풍어를 기원한다. 지역에 따라 오색기 대신 삼색기를 사용하기도 하고, 오색기에 上자를 써서 하나의 깃발로 만드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장군기나 봉기, 호기 등은 주로 조기잡이 권역인 서해안에서 지엽적으로 전승된다.
 

거문도 풍어제를 지내기 위해 해상퍼레이드의 선두에 선 지수호의 뱃기 모습.

뱃기의 전통은 근대시기를 지나면서 기존 깃발에 추가하는 방식으로 분화한다. 대한제국기에 태극기가 국기로 정해지면서 배에서도 태극기를 매달기 시작하고, 일본의 어업기술이 도입되면서 일본 배들이 사용하는 대어기도 추가되었으며, 어선마다 배 이름을 짓고 관청에 선명을 등록하면서 선주기도 추가된다. 일반적으로는 대어기에 배와 선주의 이름을 병기하는 사례가 많다. 그런데 이 중에서 대어기는 한국의 어업 관념과 사뭇 다른 것이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는 ‘풍어’에 대한 관념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는데, 일본에서는 풍어와 더불어 ‘대어(大漁)’ 관념이 부각되기 때문이다.

풍어와 대어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글자를 그대로 해석하면 ‘풍어’는 물고기가 많이 잡혀서 풍성하기를 기원하는 것이고, ‘대어’는 큰 고기가 잡히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물론 풍어의 관념 속에 큰 고기에 대한 기대가 들어있고, 대어의 관념 속에도 풍성함에 대한 기대가 담겨있다. 그러나 뱃기로 대어기(大漁旗)를 제작하여 매다는 것은 큰 고기에 대한 소망을 특별히 각인하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일본에서 시작된 대어기는 11세기부터 유래가 전하지만 구체적인 기록은 에도시대부터 등장하고, 일반적으로는 19~20세기부터 널리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어(大漁)라는 관념을 뱃기로 각인시켜 일반화한 것은 일본에서도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닌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에서 들어온 대어기 문화가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지속되고 현재는 대부분의 어선에서 일반화된 문화적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는 점이다. 뱃사람들이 일본문화의 영향인 것을 몰라서 유지하는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렇지 않다.

중요한 이유는 근대시기를 거치면서 어획물에도 상품성의 가치가 부각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전통시대 한국을 대표하는 어종으로 서해의 조기, 동해의 명태와 오징어, 남해의 멸치는 모두 어군 단위로 이동하는 어종으로 크기보다는 많이 잡는 것이 중요했다. 엄청난 수의 고기떼를 그물로 가두어 잡는 것이기에 고기의 크고 작음을 구별하여 잡을 수 없고, 소비하는 사람들도 크기보다는 수량에 더 가치를 둘 수밖에 없었다.

이에 비해 일본은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참치잡이나 고래잡이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고기잡이 방식에 따라 다르지만, 여러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참치나 고래를 비롯한 대형 어종은 크기에 따라 가격이 천양지차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큰 참치의 경우 수천만 원을 호가한다. 즉, 일본에서는 좀 더 이른 시기부터 물고기의 크기에 따른 상품성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이다.

어선어업은 아니지만 관련된 사례로 1900년대 초 일본의 해녀들과 제주 해녀들이 경쟁했던 일화를 들면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1899년 통어장정 이후 일본 해녀들이 제주도로 와서 한국 해녀들과 경쟁적으로 해산물을 채취할 때가 있었다. 당시 한국 해녀들이 오래 잠수하고 더 많이 채취했음에도 일본 해녀들에 비해 수익이 적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상품성에 있었다. 일본 해녀들은 값을 많이 받는 큰 전복을 채취하는 데 집중했는데, 제주 해녀들은 크기와 상관없이 많이 잡았다. 결과적으로 상인들은 수량이 적더라도 큰 전복에 훨씬 많은 돈을 지불한 것이다. 그 일 이후 제주 해녀들도 상품성을 고려하며 채취하기 시작해 일본 해녀들과 경쟁하고, 오히려 일본으로 진출하게 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의 경우 근대시기 이전의 어업에서 해산물의 상품성은 크기보다 수량에 있었다.

이쯤 되면 우리의 어선에서 대어기가 여전히 유지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수협 위판장에 가면 생선상자마다 가격을 부여하고, 중매인들이 눈치싸움을 하며 경매에 참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경매에 나온 생선의 가치는 여러 조건에 따라 달라지지만 근본적으로 크기에 따른 가치가 크게 작용한다. 그리고 많이 잡더라도 작은 고기는 잡어처럼 취급하여 헐값에 팔린다. 즉, 고기를 많이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큰 고기를 잡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이제 어업에서 풍어는 대어의 가치를 빼놓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어선에서 안전과 풍어를 상징하는 다양한 깃발 속에 대어기는 상품경제에서 필수적인 기능과 관련되기 때문에 전통적이지 않더라도 유지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송기태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교수)
글·사진/송기태(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교수)
정리/김우관 기자 kwg@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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